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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자주 나도 소화기 없었다…방 한칸 일곱 식구 '땟골'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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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 27일 화재로 다섯 남매 중 네명을 한꺼번에 떠나 보낸 나이지리아인 A씨(55) 가족은 작은 방 한칸에 주방 및 거실 공간이 딸린 약 40㎡(12평) 집에 7명이 모여 살았다. 비슷한 크기의 집들이 모인 해당 다세대주택 건물엔 11가구가 거주했고, 가구당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7명씩 총 41명이 살고 있던 것으로 파악됐다. 거주자들은 러시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에 살다 한국으로 온 고려인 후손들과, 나이지리아 국적의 A씨 가족이었다. 한국인 가구는 한 곳도 없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화재조사팀이 28일 오전 안산 선부동 나이지리아 5남매 가족이 살던 거주지 내부에서 화재 패턴 등을 조사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경기도소방재난본부 화재조사팀이 28일 오전 안산 선부동 나이지리아 5남매 가족이 살던 거주지 내부에서 화재 패턴 등을 조사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A씨 가족은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50만원을 내고 이곳에 자리 잡았다. A씨는 재활용 업체 등을 돌며 폐가전과 옷가지 등을 모아 나이지리아에 보내 생계를 유지했다. 그를 알고 지낸 지인들은 “먹고 살려고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A씨의 이웃들 역시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고, 주변 공단에서 일한다. 이들은 시설이 낡고 공간이 좁아도 집값이 싼 지역으로 모여들었고,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뤘다. 화재가 발생한 다세대주택이 있는 안산시 선부동과 원곡동 일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5만원…“고시원보다 저렴” 소문에 외국인 몰려

선부동에는 외국인 1만58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불이 난 다세대주택 반경 500m 안에 거주하는 고려인 동포만 30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과거 선부동과 원곡동 일대는 벼과 식물인 띠가 많이 나는 동네라는 뜻에서 ‘땟골’로 불렸다. 그러다 1987년 반월국가산업단지 조성과 함께 반월산단 공장 노동자 가족을 위한 다세대주택 단지로 변모했다.

땟골 일대는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산단 공장의 기숙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10여년 전부터 고려인 후손을 비롯한 공단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값이 싸다고 소문이 난 땟골마을로 몰리기 시작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메우면서, 지역색도 함께 변한 것이다. 땟골마을에선 한글 간판보다 러시아어 간판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다.

A씨 가족이 2년여 전 화재 피해를 입은 원곡동의 다세대주택 역시 이번에 불이 난 집에서 불과 도보 5분 거리다. 이 일대엔 내국인보다 영주권을 가졌거나 재외동포(F4) 비자를 받은 고려인 3세 등 외국인이 더 많이 산다. 안산시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원곡동 인구 3만3179명 중 외국 국적 동포(고려인 등)가 1만3429명(40.47%), 외국인 1만3846명(41.73%)에 달한다. 내국인은 전체 10명 중 2명 미만 꼴인 5895명(17.76%)이다.

1989년 4월 준공된 원룸 건물의 주인 김나영(가명)씨는 “우리 건물 원룸은 8평(26.4㎡)에서 12평(39.6㎡) 크기인데 보증금 50만~100만원에 월세 25만원을 받는다. 고시원보다 더 싸다”며 “혼자 왔거나 부부가 함께 온 러시아·우즈벡·베트남·필리핀·파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출신 외국인들이 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안산 선부동과 원곡동 일대는 벼과 식물인 띠가 많이 자생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땟골로 불리다 반월산단 조성 당시 노동자 계층이 유입되면서 발전하다 급속히 내국인이 사라지고 고려인, 외국인 이주민들이 주거비 부담이 덜 한 땟골로 모여 마을을 이뤘다. 손성배 기자

안산 선부동과 원곡동 일대는 벼과 식물인 띠가 많이 자생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땟골로 불리다 반월산단 조성 당시 노동자 계층이 유입되면서 발전하다 급속히 내국인이 사라지고 고려인, 외국인 이주민들이 주거비 부담이 덜 한 땟골로 모여 마을을 이뤘다. 손성배 기자

물 양동이 건넨 고려인 청년 “돕고 싶었지만 우리 집에도 소화기 없었다”

문제는 대부분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된 건물들인 데다 기본적인 재난 안전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들이 주로 살아 위험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소화기조차 없었던 A씨 집처럼, 실제 28일 방문해 본 선부동 일대 다세대주택 중 상당수는 화재경보기는 물론 건물 내에 소화기 하나 갖추지 못한 곳도 수두룩했다.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거나, 곳곳에 쓰레기 더미가 방치된 채 쌓여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또한 좁은 골목에 주차 공간이 충분치 않은 건물이 모여있어 화재 시 소방 장비의 접근이 어려울 것 같은 집도 많았다.

주민들도 위험을 잘 알고 있지만, 당장 손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2019년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 후손 나제스다(63)씨는 “맞은편이 불이 난 건물이라 자다가 뛰쳐나갔다. 불이 무섭게 번졌지만 뭘 할 수 없었다”며 “우리 집에도 소화기가 없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나이지리아 가족이 살던 집이 내려다 보이는 옥탑방에 샌드위치 패널로 지은 방에서 남편 및 손자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웃인 고려인 3세 이필립(31)씨 역시 화재 당시 좌절감을 느꼈다고 했다. 불이 난 곳과 담을 맞댄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사는 그는 119 대원들이 도착하기 전 양동이에 물을 받아 A씨에게 건네줬다. 이씨는 “불이 크게 나서 연기가 많이 나고 있었고, 옆 집에 사는 아프리카 사람(아버지)이 큰 소리로 ‘물! 물! 물’이라고 외쳐서 양동이에 물을 채워줬다. 하지만 싱크대에서 물이 졸졸 나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소화기라도 집에 있었으면 줬을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27일 오전 3시28분쯤 난 불로 나이지리아 4남매가 숨진 안산 선부동 다세대주택. 5남매의 어머니(41)는 안방 창문을 밀쳐 열고 두 살배기 막내를 먼저 탈출시킨 뒤 본인도 바깥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건졌다. 허리와 다리 골절상을 입고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와중에 4남매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손성배 기자

27일 오전 3시28분쯤 난 불로 나이지리아 4남매가 숨진 안산 선부동 다세대주택. 5남매의 어머니(41)는 안방 창문을 밀쳐 열고 두 살배기 막내를 먼저 탈출시킨 뒤 본인도 바깥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건졌다. 허리와 다리 골절상을 입고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와중에 4남매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손성배 기자

땟골 일대 빈번한 화재, “소방시설 보급 검토”

해당 지역이 화재 등에 취약하다는 것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땟골 일대는 고잔신도시 등 신규 조성 택지에 비해 가구 수가 적은 편인데도 화재 신고는 오히려 잦았다. 경기소방재난본부 화재 발생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안산 선부동에서 발생한 화재는 총 45건으로 25개 행정동 중 가장 많았고, 원곡동 역시 최근 5년 간 134건의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2021년 12월엔 50대 중국인 B씨가 거주하던 원곡동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가스 폭발로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불은 신병을 비관한 C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했고, 폭발 영향으로 부상자 대부분이 크게 다쳤다.

안산시와 소방당국 역시 외국인 밀집지역이 재난에 취약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불이 난 다세대주택 주변엔 소화함을 설치하고 올해 안에 1500가구에 소화기와 주택용 화재감지기를 지급할 계획이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에 내국인이 없어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구분되지 않는 저소득 외국인 가구는 지급 대상에서 빠져 있다. 당국은 이번 화재 피해를 계기로 외국인 가구에도 주택용 소방시설 보급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노후화된 시설 자체의 문제도 당장 개선이 어려운 부분이다. 김영숙 안산시고려인문화센터 센터장(사단법인 너머 상임이사)은 “80년대만 해도 땟골은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좋은 주택이었지만, 내국인들이 빠져나가면서 방문취업 비자로 온 고려인과 외국인들의 마을이 됐다”며 “동네 자체가 낙후된 탓에 온갖 위험에 노출돼있는 상황이라 도움과 개선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 5남매 가족에게 화마가 덮친 다음 날인 28일, 화재 발생지 인근의 한 공영주차장 앞에 서 있는 폐지 줍는 할아버지. 손성배 기자

나이지리아 5남매 가족에게 화마가 덮친 다음 날인 28일, 화재 발생지 인근의 한 공영주차장 앞에 서 있는 폐지 줍는 할아버지. 손성배 기자

한편 경기 안산단원경찰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숨진 남매들의 시신을 부검 의뢰한 결과 화재 연기로 인한 질식사로 추정된다는 1차 구두 소견을 받았다고 밝혔다. 숨진 4남매의 빈소는 안산군자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안산에 거주하는 나이지리아인 공동체 구성원들은 타향에서 숨진 아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빈소를 찾아왔다. 고대안산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A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어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했다. 부모 대신 빈소를 지킨 남매의 삼촌 D씨는 “어제부터 계속 울었다. 부모들은 심정이 오죽하겠나”라며 “지금 필요한 건 지지와 지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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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피해로 4남매를 잃은 나이지리아 가족이 살던 안산 선부동. 지상에 서 있는 전신주에 전깃줄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손성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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