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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핵이 파괴한 김정은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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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김정은은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고 싶었다. 불량국가라는 이미지를 지우고 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반듯한 국가의 수장이 되길 원했다. 그 일환으로 김정일의 군(軍) 우선 정책을 폐기하고 당과 내각이라는 ‘정상적’인 제도를 통해 나라를 통치하려 했다. 자신의 직함도 김정일이 쓰던 국방위원장이 아니라 국무위원장이라 불렀다. 비정상으로 보일 만한 선전과 관행도 바꾸었다. 북한 교과서엔 김일성이 축지법을 썼다고 기록되었으나 2020년 5월 노동신문은 축지법은 없다며 이를 부정했다. 또 여느 국가수반처럼 각종 행사에 리설주를 동행했다. 2021년에는 유엔에 지속가능발전 보고서를 제출했고, 2020년 당대회 보고서는 여성 대표자 비중이 10%라고 뜬금없이 밝히기도 했다.

핵이 있는 한 정상국가 될 수 없고
권력의 4대 세습도 불가능해져
북핵은 김정은의 꿈을 파괴할 뿐
결단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직함을 고치고 아내를 대동하고 여성 대표의 비율을 언급한다고 정상국가가 되진 않는다. 무엇보다 정상국가는 세계와 교류하고 협력한다. 그러나 핵은 북한을 세계로부터 단절시켰다. 유럽의 한 대학은 2016년 4차 핵실험 전 북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그러나 유엔안보리 제재가 실행되자 제재와 무관한 분야인데도 이 학생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이 청년이 자신의 장학금 일부를 북한에 보낸 것이 문제였다. 학교는 이를 북한에 외화가 유입되지 못하게 막으려는 제재 목적에 위반된다고 보았다. 김정은의 핵은 북한 청년들의 꿈을 앗아갔다. 핵 개발이 없었고 그래서 제재도 없다면 북한 청년들이 외국에서 새롭고 유익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전문가와 관료들이 해외에 나와 경험을 쌓고 북한의 미래를 개척할 역량을 키웠을 것이다. 핵으로 인해 무역이 단절되면 지금 당장 고통을 겪겠지만 인재를 키우지 못하면 북한의 미래까지 황폐해진다.

외부 지원 없이도 국민 생존이 가능해야 정상국가다. 그러나 김정은의 핵 개발은 주민의 삶을 무너뜨렸다. 경제제재를 받기 전엔 아사하는 주민이 거의 없었다. 충분치는 않지만 끼니는 때울 수 있었다. 식량 생산이 증가하고 시장 유통이 원활했기 때문에 원조도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사자까지 나온다. 더욱이 국제사회가 식량 원조를 제안해도 자력갱생하겠다며 받지 않는다. 거의 모든 주민이 코로나 백신을 맞지 못했는데도 백신 지원 제안마저 거절한다. 식량이든 백신이든 남한이나 서방의 원조를 받으면 자력갱생의 실패를 자인하는 셈이고 그러면 핵 국가로서 인정받기 어렵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상국가는 다른 국가를 위협하지 않는다. 김정은은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줄곧 신년사에서 ‘남녘 겨레에게 새해 인사를 보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을 계속했다. 특히 2022년 하반기에는 핵의 선제 사용을 법제화하고 연말에는 북한의 초대형방사포가 “남조선 전역을 사정권에 두고 전술핵 탑재까지 가능하다”며 위협했다. 심지어 자국 주민도 겁박한다. 핵이 아니라 밥을 원하는 주민의 불만이 증가하자 ‘인간개조 사업’을 내세우며 언어와 행동을 통제하고 외부 문물의 유입을 막고 있다. 2022년에 제정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따르면 적대국의 사상문화를 유포할 경우 사형에도 처할 수 있게 했다. 핵 개발이 몰고 온 비(非)정상의 광풍이 아닐 수 없다.

핵은 김정은의 개인적 꿈인 권력 세습도 파괴했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자식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사라지고 있다. 권력과 핵을 지키고자 공포정치란 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정치는 당대의 권력 유지엔 도움 되지만 세습에는 치명적인 해가 된다. 소련에서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처음에는 치안기관 수장 출신 베리야가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경험했던 권력 엘리트들은 합심하여 잔혹한 베리야를 몰아내고 온건파인 흐루쇼프를 서기장으로 앉혔다. 베리야 치하에서 다시 공포정치라는 악몽을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무서웠던가를 시사하는 기록이 있다. 스탈린의 경호원은 그가 침실 바닥에 쓰러진 채 약간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스탈린을 두려워해 그의 상태를 직접 살피는 대신 정치국원에게 보고했다. 4명의 핵심 정치국원이 모여 회의한 끝에 침실에 들어갈 두 명을 뽑았다. 권력 서열 2, 3위의 말렌코프와 베리야였다. 이들이 침실로 걸어갈 때 말렌코프의 새 구두가 나무 바닥에 닿아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스탈린이 깨어 화낼 것을 두려워한 말렌코프는 구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스탈린은 회생 불능 상태가 되었다. 과연 북한 권력층은 김정은이 지목하는 후계자를 순순히 받아들일까.

핵을 쥔 채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 수는 없다. 권력도 물려줄 수 없다. 10년 이상 경제난을 버틸 수도 없다. 그럼 김정은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인가. 결단의 시간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다.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