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정재홍의 시선

국가 근본 흔드는 ‘이공계 엑소더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최근 한 모임에서 중학생 남자아이를 미국에 홀로 유학 보낸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한 해 6000만원이 넘는 아들 유학비를 대느라 힘겨워하면서도 아들이 미국 학교에 잘 적응한다며 다행스러워했다. 또 아들이 미국에서 대학까지 나와 그곳에서 취업해 살기를 바랐다. 그러자 초등학생 아들을 둔 다른 아버지가 “내 아들도 미국에서 취업했으면 좋겠다. 10여년 뒤 아들이 취업할 때에는 한국에 좋은 일자리가 없을 것”이라며 “한국엔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한국의 미래를 비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로 세계에서 가장 낮았다. 결혼과 자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낮아지며 출산율 감소 추세는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 급속한 고령화로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지난해 17.5%에서 2050년 세계 최고 수준인 39.4%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현재 세계 10위권인 한국 경제는 2050년 15위권 밖으로 밀려나고, 2060년 이후에는 주요 국가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설 전망이다.

저출산·고령화에 미래 불투명
최상위 인재들은 의대에 몰려
산업 이끌 이공계 파격 지원을

저출산·고령화는 국민연금 재정도 급속히 고갈시킬 것이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는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경우 2041년에 기금이 적자로 전환되고, 2055년에는 바닥날 것으로 예측했다. 많은 청년이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도 나중에 연금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가능한 한 빨리 합리적인 수준으로 인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3대 개혁의 하나로 내걸었지만 행정부가 아닌 국회에서 주도하게 한 데다 국회마저 사실상 손을 놓으며 연금개혁이 언제 이뤄질지 오리무중이다.

미래가 불투명하니 의대 등 안정적 일자리를 원하는 수요는 치솟고 있다. 고급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카이스트 등 4대 과학기술원에서 최근 5년간 1000명이 넘는 학생이 중도 이탈했다. 올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자연계열에 합격했으나 등록을 포기한 학생은 737명이다. 이중 상당수는 의대에 진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가 야심 차게 지원책을 마련한 반도체학과에서도 등록 포기자가 많았다. 의대 정시전형 합격자 중 재수생을 포함한 N수생 비율은 8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공계 엑소더스’와 ‘의대 블랙홀’이다.

최상위 인재의 의대 쏠림은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의대생들은 졸업하면 대개 일반의로 환자를 돌본다. 환자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최상위 인재들을 독식할 만큼은 아니다. 의사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바이오 등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서 일하지 않는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을 유지하고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려면 이공계 인재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미래 먹거리 산업은 얼마나 많은 이공계 인재들을 길러내느냐에 달렸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기아차·LG에너지솔루션 등이 미래에도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이 되려면 세계적 수준의 이공계 인재들이 수혈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전폭적인 이공계 지원과 함께 국민 의식 전환이 있어야 한다. 정부는 최우수 인재들이 의대가 아닌 이공계에 지원하도록 과학기술 인재 육성을 위한 예산 확대와 기술개발 관련 세제 혜택, 이공계 진로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 등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초·중등 때부터 이과 수업 비중을 50% 이상(현재는 30%) 늘려야 한다. 대통령이 과학기술자를 요직에 임명하는 등 이공계 우대 정책을 지속해서 펼칠 필요가 있다.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회고록 『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에서 이스라엘의 성공 비결로 “거침없이 상상하라. 내일의 지식을 선점하라. 첨단기술 강국 이미지를 구축하라”고 말했다. 불모의 사막을 옥토로 바꾸고 기업가정신을 장려해 세계적 창업국가로 거듭난 이스라엘의 성공은 한국의 성장 신화와 다르지 않다.

한국은 6·25 잿더미에서 1인당 소득 3만3000달러의 선진국으로 거듭났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 97~98년 외환위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재도약했다. 저출산·고령화와 미·중 전략경쟁, 불투명한 미래 먹거리는 한국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 타개하려면 세계적 수준의 이공계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국가 역량을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