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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어머니와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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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햇볕이 웅크린 꽃눈을 깨우는가 싶더니, 금세 꽃이 피었다. 성급한 벚꽃 몇몇은 벌써 만개하여 자태까지 뽐낸다. 그래도 일교차가 심해서 털신을 벗기에도, 흰 고무신을 신기에도 아직은 좀 이른 감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털신은 몇 해 전 『금강경』 강의 첫날, 어느 분의 정성 어린 선물이다. 그 후 매해 겨울만 되면 노란 꽃을 단 채 법당 앞에 놓였다. 꽃단추를 단 털신이 재밌는지 보는 이마다 미소를 짓는다. “어느 보살님 선물이라 신어요.” 수줍게 변명하다 보니, 어느덧 부끄러움 대신 마음에 꽃이 피었다. 누군가의 정성이란 그런 건가 보다.

정성은 상대의 마음에 피는 꽃
탐욕의 기도 아닌 비움의 기도
서로 어머니의 손이 되었으면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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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느 밤, 휘영청 밝은 달이 좋아 스님들과 함께 팔공산에 올랐다. 갓바위 부처님도 뵙고 둥근 달도 보자며 헉헉대며 올라갔다. 그 길에서 한 노보살님을 보게 되었는데, 워낙 노인인지라 계단 하나 오르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빈 몸으로 오르기에도 힘든 계단을 쌀까지 이고 가니, 노인의 허리는 줄곧 90도로 꺾여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쉬는 틈에도 쌀을 내려놓지 않았다.

뒤따르던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되어 여쭈었다. “보살님, 제가 좀 지고 갈게요.” 노보살님은 손사래를 쳤다. 잠시만 들어드린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부처님께 올릴 쌀을 스님이 지고 가면 우짭니꺼? 그런 소리 마이소. 내 새끼 위한 긴데, 제가 지고 가야지예.” 함께 가던 스님도 한마디 거들었다. 직접 이고 가셔야 보살님 마음이 편할 거라고.

아들의 병고일까? 사업이 어려운 걸까? 갓바위에 먼저 도착해 바람에 몸을 휘청거리며 절을 올리면서도 노보살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잘 올라오고 계시려나? 돌도 나이를 먹어야 품이 너르다던데,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신다는 갓바위 부처님의 너른 품에 기대어 소원을 빌었다. “저 공양미가 누구를 위함이든 한밤중에 노쇠한 몸으로 부처님을 찾아오는 저분의 정성이 꼭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날 나의 소원은 그뿐이었다.

어머니 얘기가 나오니, 문득 어느 스님이 떠오른다. 출가를 한사코 말리던 홀어머니를 출가 후 몇 년 만에 찾아간 외아들 스님이 있었다. 친구에게서 어머니의 병고를 전해 듣고, 하안거(여름 수행)가 끝나는 대로 찾아갔단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아들은 비를 흠뻑 맞으며 어머니를 애타게 불렀다. 그토록 그리운 아들일 텐데, 모친은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스님은 어머니의 분노가 그리 큰 줄 몰라 처음엔 당황했다고 한다.

얼마 후 마음을 다잡은 스님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며칠이나 비를 맞으며 기도했다. 어머니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어머니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소망하면서. 드디어 대문이 열리던 날, 어머니와 아들은 부둥켜안고 오래오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마음속에 맺혔던 응어리가 다 풀려나가는 눈물이었다.

기도란 이런 것이 아닐까. 서로를 위해 마음을 비우게 하고, 고통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간절한 정성! 이화인 시인은 ‘기도의 힘’을 이렇게 노래했다. ‘몹쓸 역병이 돌던 그 겨울/ 봄이 죽었다고/ 봄은 절대 오지 않을 거라던 그해에도/ 봄은 거짓말처럼 왔다// 기도의 힘은/ 늘/ 길 끝에서 새 길이 시작되고/ 막장 앞에서 통하는 곳이 보였다// 그것은 기적이 아닌 기도의 힘이었다/ 간절한 기도의 힘은/ 절박한 고비마다 꽃으로 피었다.’

대문을 열어주지 않던 사이에도 어머니는 아마 마음으론 아들 옆에서 내내 함께했을 것이다. 아들이 감기라도 들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어머니란 존재는 늘 그렇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육신의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뭐든 정성을 다한다. 특히 한국의 어머니는 유독 그 정이 더 강하게 표현된다. 성당이든 절이든, 새벽부터 그곳을 찾는 어머니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집착이든 사랑이든 그런 마음을 어렴풋이 알기에, 우리는 어머니 사후에도 그분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불교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믿는 관음신앙이 가장 인기다. 관세음보살은 이름처럼 ‘세상의 소리를 보고 듣고 관하여 보살펴 주는 어머니 같은 분’이다. 천 개의 손에 낱낱이 천 개의 눈을 가졌다고 해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다. 신영복 선생은 천 개의 손에 천 개의 눈이 박혀있으니, 그 손을 일컬어 ‘마음이 있는 손’이라고 했다. 그 어떤 손이든 마음이 있는 손이어야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보살핌 없이 한평생 안락하게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신세도 지고, 누군가에게는 선뜻 도움도 주어야 한다. 좋은 관계는 그냥 둔다고 꽃이 되지 않는다. 정성껏 가꾸어야만 비로소 꽃이 핀다. 손뿐만 아니라, 우리의 머리에도 가슴에도 두 발에도, 따뜻한 배려의 꽃이 피기를 기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음의 손, 어머니의 손이 되기를 기도한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