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이원석 총장 취임 뒤 '항소 포기' 잦아진 검찰..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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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검찰의 ‘기계적 항소’ 관행 달라질까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선생님, 저희(검찰)도 이 사건을 중요한 사건으로 보아 항소 여부에 대해 여러 입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민위원회를 열어 논의토록 했는데, 특히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할 것 같으니 참석해 고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 1월 23일,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현재 기획부총장)의 전화가 울렸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중증장애인 딸에게 수면제를 먹여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60대 여성 A씨가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가 선고된 직후였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 12년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였다.

그러나 검찰은 즉각 항소하던 관행 대신 시민위원회를 열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이 총장이 연명의료 권위자인 윤영호 서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에게 직접 전화해 위원회 참석을 요청한 것이다. 이 총장은 A씨 판결을 보도한 기사도 윤 부총장에게 문자로 보냈다.

선천적 장애에 대장암 3기 딸 38년간 돌봐온 한 엄마의 범죄
검찰, 양형에 못 미친 판결이지만 전문가위원회의 의견 수용
편의점 알바생 ‘족발’ 사건 계기로 사회적 약자들의 상황 따져
간병·조력살인 경계해야…‘의사조력존엄사법’ 도입 검토할 때

검찰총장이 서울대 의대 교수에 전화

지난해 5월 25일 1급 장애 30대 딸을 숨지게 한 혐의(살인)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60대 A씨가 인천지방법원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들어오는 모습. A씨는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가 선고됐으며, 검찰이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연합뉴스]

지난해 5월 25일 1급 장애 30대 딸을 숨지게 한 혐의(살인)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60대 A씨가 인천지방법원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들어오는 모습. A씨는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가 선고됐으며, 검찰이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연합뉴스]

윤 부총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다만 “일정상 참석이 어려우니 의견서를 보내겠다”고 했다. 이어 검찰이 보내준 판결문과 사건 개요를 검토한 윤 부총장은 A4 용지 2장 분량의 의견서를 시민위원회에 제출했다. “A씨 행위는 살인이 분명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도 방어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서 행한 행위로 해석할 여지가 커  1심 판결은 타당하다”는 의견을 냈다.

뇌병변 1급 중증장애인이던 A씨의 딸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했고 의사 표현도 못 하는 가운데 사망 몇 달 전엔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남편과 떨어져 살던 A씨는 딸의 대소변까지 받아 가며 38년간 돌봐온 끝에 범죄를 저지르게 됐다.

윤 부총장은 “A씨는 유죄지만 국가가 A씨의 고통을 돌봐주지 못한 점에서 피해자이기도 해 의료 윤리상 ‘정의의 원칙’에 비추어 보면 1심 선고는 타당하다”는 의견을 냈다. 윤 부총장은 의학적으로도 A씨의 딸은 대장암 3기 상황에서 부작용으로 치료를 중단해 극심한 고통을 받는 데다 생명을 유지할 기간이 길지 않다고 봤다.

생활고에 시달린 어머니의 범죄

윤 부총장의 의견서를 제출받은 시민위원 10명은 만장일치로 ‘항소 부제기’ 의견을 냈고 검찰은 검토 끝에 항소를 포기했다. 구형량의 반 이하 형이 선고되면 항소해온 검찰로선 이례적이란 평가다. 하지만 이런 기조는 지난해 9월 이원석 검찰총장이 취임하면서 이미 감지되온 변화라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이 총장 취임 엿새 만인 지난해 9월 22일 서울중앙지검은 ‘5900원 족발 세트’ 사건과 관련해 시민위원회를 개최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족발 세트를 도시락으로 착각해 폐기 시간보다 4시간 빨리 먹었다는 혐의(횡령)로 점주로부터 고소당했다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인데, 이에 검찰이 항소하며 논란이 됐다. 당시 소집된 시민위원회는 2시간 넘는 토론 끝에 항소 취하 의견을 냈고,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다.

또 두 달 뒤인 지난해 11월에도 검찰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녀 4명을 살해하려 한 40대 어머니에 대해 ‘헌신적으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자진 신고한 점’을 고려, 항소를 포기해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5년이 확정됐다.

재검토 사안은 시민위원회 열어

지난해 9월 5일 이원석 검찰총장 후보(당시)가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모습. 이 총장은 당시 “기계적 항소를 지양하고, 작은 사건도 작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시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취임 후 그 취지를 담은 항소 기준을 마련해 시행 중이다. 김경록 기자

지난해 9월 5일 이원석 검찰총장 후보(당시)가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모습. 이 총장은 당시 “기계적 항소를 지양하고, 작은 사건도 작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시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취임 후 그 취지를 담은 항소 기준을 마련해 시행 중이다. 김경록 기자

검찰 고위 관계자에게 물었다.

‘간병 살인’ 성격인 A씨 사건에 항소를 포기한 것이 주목된다.
“피해자의 생명과 간병인의 고통이 충돌하는 간병 살인 같은 민감한 사안은 일선에서 대검에 보고가 올라온다. 그러면 공판송무부장과 형사부 등 유관 부서가 사건을 다시 체크한다. 그 결과 ‘재검토할 사안’이라 판단돼 시민위원회를 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총장이 전문가인 윤 부총장에게 직접 의견을 물은 것이다.”
‘기계적 항소’ 관행에 변화를 준 이유는
“이원석 검찰총장의 기조와 맞닿아 있다. 이 총장은 지난해 9월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이 검찰의 ‘항소 남발’을 지적하자 ‘기계적 항소가 피고인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데 공감하며, 지양하겠다’고 했다. 이 총장은 취임 후 이 다짐을 지켜 검사들에게 ‘항소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말라’고 주문해왔다.”
이 총장의 구체적인 주문 내용은.
“법원의 선고가 양형을 충족해도 사회적으로 더 높은 형을 받아야 할 범죄는 항소하되, 선고가 양형 기준에 못 미쳐도 구체적 내용을 살펴 항소할 이유가 없는 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경험 많은 공판부장이 사건을 직접 살펴보도록 했다. 이 총장은 취임 후 이런 골자의 항소 원칙을 일선에 내려보냈다. 이번 사건도 그에 해당해 담당 지검(인천)만 항소 여부를 판단 말고 시민위원회를 소집해 전문가 의견을 들으라고 한 것이다.” (지난해 검찰의 항소 및 상고율은 각각 14.7%, 3.4%로 전년 대비 0.1%포인트 감소했다.)

“예외적인 사건일 경우 항소 포기”

‘족발 세트’ 사건도 그런 기조에서 항소를 포기했나
“그렇다. 이 총장 등 수뇌부가 재검토를 지시해 시민위원회 의견을 들은 뒤 항소를 철회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이 총장은 청문회에서 ”이런 사건들까지 작은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시 확인해보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항소 포기가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검찰 입장에선 고민이다. 이번 사건 같은 사안에서 집행유예가 이어지면 ‘조력 살인은 괜찮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가능성이 있다. A씨 같은 가정이 여럿 있는데, 거기서 조력 살인이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이 생기는 거다. 그래서 A씨 사건은 정말 예외적인 경우임을 확실히 확인받기 위해 윤 부총장 같은 전문가의 의견을 들은 것이다. 앞으로도 전문가에 의해 예외적인 성격이 확실히 확인되는 사건에만 항소 포기를 할 방침이다.”
항소 포기를 넘어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나
“윤 부총장은 국가가 조력 사망을 결정할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으나 검찰이 그런 정책까지 거론할 순 없다. 다만 전문가 의견에 따라 예외적으로 항소 포기를 적용한 것이다. 무보수로 고견을 보내준 윤 부총장에게 감사드린다.”

“장기간의 고통, 국가도 일정 책임”

A씨는 범죄자면서 피해자”란 의견을 낸 윤영호 부총장에게 물었다.

당신의 의견이 영향을 미쳐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것 아닌가
“검찰이 내 의견만 갖고 판단하진 않았겠지만, A씨의 피해자적 측면을 검찰도 인정한 결과로 본다. 단 항소 포기를 ‘가족에 의한 간병 살인은 처벌되지 않는 것’이라고 오인하면 안 된다. A씨는 범죄자이니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장기간 간병의 고통을 개인에게만 떠넘긴 국가도 책임이 있음을 참작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번 기회에 ‘간병 살인’ 예방을 위해 간병 가족이 국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그게 뭔가.
“환자가 일반인이라면 스스로 조력 사망할 수 있는 단계임에도, 심신 미약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때 간병의 고통에 처한 가족의 요청을 전제로, 전문의 2명 이상의 판단을 근거로 국가가 환자의 생명을 단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의사 조력 사망’ 제도를 말한다. 아직 국내엔 없는 제도이나 이제 도입을 검토할 때가 됐다.”
실제 도입 움직임이 있나.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6월 15일 환자가 의사의 조력을 받아 존엄사할 수 있도록 하는 ‘의사조력존엄사법’을 발의했다. 복지부 장관과 의료, 윤리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조력사존엄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환자 본인이 담당 의사와 전문의 2명에게 조력 존엄사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경우에 한해 임종을 도운 의사의 형사 책임을 묻지 않는 골자다.”

“회복 가망이 없는 환자의 권리”

해외에선 어떤가.
“1942년 스위스가 조력사망법을 도입한 이래 미국·캐나다·호주 등 6개국에서 시행 중이다. 조력사로 숨진 캐나다인은 3만 명이 넘는다. 대다수는 ‘자연사에 근접했다’고 판단될 만큼 상태가 나빴다는 평가다.”
국내에선 도입을 놓고 논란이 예상된다.
“종교계는 ‘생명은 가장 근본이 되는 가치’라며 입법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법안이 자살예방법과 상충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회복 가망 없는 환자가 삶을 마칠 권리는 존중돼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국민도 상당수다. 숙성된 토론을 통해 논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