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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

문장가 허균, 정치인 허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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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부 기자

유성운 문화부 기자

“북경에는 황사가 때때로 일어나, 빈 창과 깨끗한 책상 위로 한바탕 울부짖으며 불어오기만 하면 날아온 먼지가 한 치 남짓 쌓인다.”

허균이 남긴 『한정록(閑情錄)』의 일부다. 그는 사신 등의 자격으로 두 차례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중국의 황사는 그때도 심각한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허균은 『홍길동전』의 작가로만 알려졌지만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 수 십여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기도 하다. 최근에 그의 저서를 모은 전집이 나오기도 했다. 빼어난 글재주로 세간의 격찬을 받기도 했지만, 정치 행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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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광해군 정권의 여당 대북파의 핵심 인사였다.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도한 강경파였다. 광해군을 위해 팔을 걷고 궂은일을 마다치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1610년 와병을 핑계로 명나라 사신을 마다하고 은거하면서 『한정록』을 지었다.

“형세에 급급한 채 끝내 한가하지 못하여 조그만 이해라도 어긋날까 마음이 두렵고, 하찮은 자들의 칭찬이나 헐뜯음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이며, 덫이나 함정에서 벗어나기만 바랐다.” 그가 남긴 서문에는 권력의 한복판에서 느낀 두려움이 남아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얼마 후 허균은 제자였던 기준격으로부터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공격을 받고 거열형에 처해졌다. 한때 동지였던 대북파의 리더 이이첨의 계략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과격한 이미지가 정권의 부담이 됐다는 것. 촉망받던 지식인이 권력의 완장을 차고 안하무인이 되어 손가락질받는 것이 낯설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