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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노량진 고시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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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성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윤성민 정치에디터

윤성민 정치에디터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자습실의 자그마한 책상에 앉아 코피 쏟으며 열중했던 자만이 합격할 수 있다.’ 1986년 11월 11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시험학원 입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기자는 “고등고시처럼 화려한 미래를 꿈꾸며 고행하는 사람들보다,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소시민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조그마한 직분에 만족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썼다. 한국 사회에서 보통 사람으로, 소시민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될지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79년 학원의 사대문 밖 분산 계획에 따라 각종 임용시험 학원이 노량진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거치며 취업문이 좁아질수록 공시생들은 노량진으로 모여들었다. 노량진역에 내리면 학원광고 속 강사들은 “때론 온화하게 혹은 공격적으로, 어느 때는 굉장히 진지하게, 어느 때는 ‘걱정 마, 아무 것도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그들에게 손짓했다. 저녁이면 근처 수산시장에서 얼큰하게 취한 직장인들이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았고, 공시생들은 3000원 남짓 컵밥으로 시장기를 해소하며 그들처럼 ‘보통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되새겼다.

꿈이 소박하다고 사소한 건 아니다. “시장한 구준생(9급 공무원 준비생) 백여명이 컵밥 노점 앞에 줄을 선다고 할 때 그중 1.3명 정도가 9급 시험에 합격했다.”(김훈 ‘영자’) 2013년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74.8대 1이었다. 노량진은 노량도(島)라고 불렸다. 노량진에 올 때만 해도 한때의 거처 정도로 여겼던 이들 중 다수가 오래 노량진에 머물렀다.

KBS ‘다큐 3일’이 노량진 공시생을 다룬 적이 있다. 엔딩곡이 가수 사이의 ‘힘내요 노량진 박’이었다. ‘나는 왜 고향을 떠나와 차가운 주먹밥을 먹나’ ‘네버 네버 기브업’ 가사에 공시생들이 눈물을 지었다.

공무원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올 9급 시험 경쟁률은 22.8대 1. 정점을 찍은 2011년(93.3대 1)의 4분의 1 수준이다. 공무원이 돼도 ‘보통 사람’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된 건지,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다른 길이 많아진 건지 가늠이 안 된다. 취업난은 여전하다는데 ‘노량진 박’들은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