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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컵밥' 40% 문 닫았다…'신의 직장' 외면하는 MZ세대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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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7일 낮 12시 서울 노량진역 인근 '컵밥 거리'. 점심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노점상 23곳 중 10곳이 문을 닫았다. 김기환 기자

17일 낮 12시 서울 노량진역 인근 '컵밥 거리'. 점심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노점상 23곳 중 10곳이 문을 닫았다. 김기환 기자

 소설가 김훈이 단편소설「영자」에서 ‘끼니때마다 식당 앞에 늘어서는 긴 줄이 노량 팔경(八景) 중 1경을 이루었다’고 묘사한 서울 노량진역 인근 컵밥 거리는 흘러간 옛 추억이었다. 지난 17일 정오 컵밥 거리는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한산했다. ‘컵밥 3500원’을 내건 점포 23곳 중 10곳이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13년째 컵밥 장사를 하고 있는 한모(58)씨는 “점심때마다 컵밥 거리가 공무원 시험 준비생으로 북적대던 건 옛날얘기”라며 “길가다 흥미로 들리는 사람 말고는 수험생 단골이 확 줄었다”고 털어놨다.

컵밥 거리 맞은편 건물 1층 폐업한 공무원 학원 창문엔 ‘임대 문의’ 딱지가 붙어있었다.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도 풍경은 비슷했다. 고시원이나 스터디 카페, 한식 뷔페 음식점, 체력시험 준비 학원 등 업종을 불문하고 문을 닫은 경우가 많았다. 공무원 시험 학원 건물엔 변호사·회계사·노무사 시험도 함께 강의한다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 권예지(23)씨는 “고시원부터 학원, 식당까지 한산해 여기가 정말 노량진이 맞나 싶다”며 “공시(公試) 인기가 떨어진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노량진 공시촌이 얼어붙고, 공시 경쟁률이 떨어지고, ‘에이스’ 공무원이 민간 회사로 옮기는 최근의 현상. 공무원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MZ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밀레니얼·Z세대를 통칭)가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며 ‘철밥통’ 공무원 사회에 일으킨 파장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신의 직장’으로 불리던 공무원 위상이 낮아진 건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 ‘사회조사결과’에 따르면 2009년엔 13~34세가 가장 근무하고 싶은 직장 1위로 국가기관(28.6%)이 꼽혔다. 2위는 ‘업무는 공무원, 처우는 민간’이 장점으로 꼽히는 공기업(17.6%)이었다. 공무원·준공무원이 선호 직장의 절반 가까이 차지해 대기업(17.1%)과 격차가 컸다. 하지만 가장 최근인 2021년 같은 조사에선 근무하고 싶은 직장 1위로 대기업(21.6%)이 꼽혔다. 2위가 공기업(21.5%)이었고, 국가기관(21%)은 3위로 떨어졌다.

9급부터 5급까지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추세다. 올해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22.8대 1을 기록했다. 1992년(19.3 대 1) 이후 가장 낮았다. 경쟁률이 정점을 찍은 2011년(93.3대 1)의 4분의 1 수준이다. 7급 시험 경쟁률도 지난해 42.7대 1로 1979년 이래 역대 최저였다. 과거 ‘행정고시’로 불린 5급 시험 경쟁률도 2021년 43.3대 1→2022년 38.4대 1→올해 35.3대 1로 하향세다.

들어오는 입구만 헐거워진 게 아니다. 나가는 출구에도 브레이크가 없다. 22일 인사혁신처가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국가공무원 의원면직자 현황’에 따르면 의원면직자는 2018년 1만694명에서 2021년 1만4312명으로 33.8% 늘었다. 의원면직은 자발적으로 퇴사한 경우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공직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중앙 부처 에이스가 줄줄이 민간 회사로 옮기는 경우도 잦다. 산업통상자원부의 경우 2021~22년에 걸쳐 차관 후보로 거론되던 김모 실장을 비롯한 과장급 간부 2명이 SK와 GS 등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앞서 2019년 일본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 관련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에서 역전승을 이끌어 이른바 ‘후쿠시마 어퍼컷’의 주역으로 불렸던 사무관이 이직하는 등 사무관(5급)까지 합친 30·40대 퇴직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기간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요직을 두루 거친 간부가 두나무·쿠팡 같은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기업뿐 아니라 외국계 기업, 스타트업, 학계로 이직이 다변화하는 추세다. 90년대 입직한 기획재정부 박모 과장은 “정책의 최종 결정권이 국회로 넘어가 보람이 줄었고, 예전처럼 퇴직하고 갈 곳도 마땅치 않다”며 “선배 공무원 세대 만큼, 그 이상으로 고생하더라도 보상받는다는 느낌이 적다”고 털어놨다. 이어 “동료가 이직하는 게 놀라운 일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조건의 회사라면 축하하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박봉’이 상징하는 낮은 급여가 대표적이다. 올해 9급 공무원 1호봉의 세전 월급은 177만원, 5급은 265만원이다. 여기에 상여금과 초과근무수당, 급식비 등 각종 수당이 붙지만, 공제회비와 연금 등으로 빠져나가는 돈도 많다. 2015년 공무원 연금 제도를 개편한 뒤 입사한 경우 노후 대비도 예전만 못하다. 취업포털 인크루의트 서미영 대표는 “최근 2~3년 새 기업 전반의 급여가 큰 폭으로 올랐는데 공무원은 지지부진해 차이가 더 벌어졌다”며 “과거엔 급여가 다소 적더라도 직업 안정성과 연금 때문에 공무원을 선호했지만 이제 버틸 수 있는 수위를 넘었다”고 말했다.

급여뿐 아니다. 공무원의 상대적인 장점으로 꼽혔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도 민간에서 많이 따라잡았다. 최근 MZ세대 취업 준비생에게 인기를 끄는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 등 정보기술(IT) 회사와 대기업의 복지가 공무원보다 나은 경우가 많아졌다. 서미영 대표는 “공무원이 누리는 복지에 더해 재택·탄력 근무 등 더 나은 복지 제도를 갖춘 민간 기업이 많이 늘었다”고 분석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당선 직후 정부세종청사에서 MZ세대 공무원과 간담회를 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당선 직후 정부세종청사에서 MZ세대 공무원과 간담회를 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MZ세대가 성장 가능성을 우선하는 경향도 영향을 미쳤다. 이해영 영남대 행정학과 교수는 “MZ 세대는 평생직장을 다니는 안정감보다 도전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크다”며 “기업 문화도 상명하복보다 스타트업식 자유로운 소통을 선호하는데 공무원 조직은 여러 면에서 MZ세대 가치관과 충돌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가 주도에서 민간 주도 경제로 넘어가면서 과거처럼 일에서 성취감을 찾기도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일터를 바라보는 MZ 세대의 가치관이 달라진 건 최근 현대차 생산직 채용 공고에 지원자가 몰린 데서도 엿볼 수 있다. 현대차 생산직은 근무지가 지방이지만 근무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데도 1인당 평균 급여가 1억원에 육박한다. 만 60세 정년을 보장하는 데다, 복지 혜택도 탄탄해 인기를 끌었다. 인터넷 카페에는 ‘공무원 vs 현대차 생산직’ 등의 제목을 달아 두 직업을 비교하는 글이 올라왔다. ‘블루칼라’ 육체노동이지만 공무원보다 낫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낮은 급여 때문에 인재가 몰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자 ‘대통령보다 연봉을 많이 받는 공무원’이 상징하는 ‘한국판 NASA’ 입법에 착수했다. 인사혁신처는 최근 ‘공무원 시험 수험생을 위한 공직 안내서’를 발간하고 인재 유치 프로젝트에 나섰다. 이찬희 인사혁신처 인재정책과장은 “하위·실무직 공무원 처우를 개선하고 수평적인 조직문화 조성, 수험생과 소통 강화, 채용제도 개선 등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이해영 교수는 “경제가 국가에서 민간 주도로 넘어가면서 과열됐던 공무원 인기가 식는 건 '비정상의 정상화'로 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며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공무원은 여전히 인기 있는 직장"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인재가 공직으로 몰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공직자로서 사명감과 자부심을 북돋을 수 있도록 ‘복지부동’ 조직 문화부터 바꾸고 민간 기업처럼 성과에 따른 보상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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