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가득 핀 27일 오후 충남 공주시 계룡산은 예년과 약간 다른 풍경이었다. 군락지 입구는 사진을 찍는 상춘객과 차량으로 붐볐지만, 벚꽃 축제 현수막이나 행사 안내 요원이 없었다. 벚꽃이 공주시청의 예상보다 일찍 피어서 벌어진 일이다. 계룡산 인근 청주 관측지점의 벚꽃 만개일은 하루 전인 26일이었다. 기상청은 벚꽃이 80% 이상 피었을 때를 만개로 부르는데, 이번엔 평년보다 12일이나 빨랐다. 공주시가 계획한 벚꽃 축제 개막식은 4월 7일이다. 경기도 수원에 사는 상춘객 김나영(29)씨는 “벚꽃이 빨리 질까봐 예정보다 일찍 꽃구경 왔다”고 말했다. 공주시는 급히 안내요원 등을 투입했고 28일 회의를 열고 ‘강제로’ 앞당겨진 축제의 대책을 논의한다.
4월에 피는 봄꽃도 보름 일찍 개화
벚꽃뿐만 아니라 봄꽃들의 개화가 빨라지고 있다. 27일 기상청의 계절 관측에 따르면 올해 벚꽃은 지역에 따라 평년(1991~2020년 평균)보다 최대 16일 일찍 개화했다. 서울은 관측이 시작된 1922년 이후 두 번째로 빠른 25일에 벚꽃이 폈다. 부산과 대구, 광주 등 남부 지방은 벚꽃이 평년보다 7~16일 빠른 추세로 이미 만발했다. 4월에 피는 배꽃과 복숭아꽃도 각각 최대 16, 17일 일찍 개화했다. 기상 당국은 따뜻해진 겨울 등 기후 변화를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 센터장은 “2019년 즈음부터 날씨의 변동폭이 예상치를 뛰어넘을 정도로 커졌다. 이번 3월의 고온 수준을 2월에 예측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봄의 신호탄인 봄꽃 개화가 앞당겨지는 상황을 생태학자들은 크게 우려한다. 봄꽃이 피면 곤충을 비롯한 생태계의 구성 요소들이 계절 활동을 시작하는데, 기후변화로 인해 식물과 곤충 등 종(種)간에 ‘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서로 연결된 종들이 기후변화에 다른 속도로 반응하면서 오랫동안 유지돼 온 생태학적 관계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종(種)간 탈동조화 가속화…범블비 멸종 위협
일찍 핀 봄꽃은 꿀벌 등 벌의 생태계에 혼란을 일으킨다. 많은 야생벌들이 땅속에서 겨울을 나는데 땅속은 더 늦게 따뜻해진다. 올해처럼 겨울에 눈이 적게 내리거나 봄철이 건조하면 땅속과 대기의 온도 격차는 더 커진다. 한국양봉학회장인 정철의 안동대 식물의학과 교수는 “범블비(bumble bee)로 알려진 뒤영벌이 시간적 불일치로 인해 멸종 위협을 겪고 있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다”고 말했다. 일찍 개화한 꽃은 매개 수분을 해줄 벌이 없고, 뒤늦게 땅 밖에 나온 야생벌은 먹이(꽃)가 부족한 상황에 부닥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국내 야생벌들의 밀도는 지난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시간적 불일치(탈동조화)로 인해 다음 세대는 더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철새를 연구하는 최창용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는 “제비는 보통 3월 말이 되면 제주나 남해안에 도달하는데 기후변화 등의 영향으로 일찍 한반도에 도래했다가 한파를 만나 폐사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40마리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한꺼번에 얼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 달 전 정하는 축제 일정…예측 실패로 지자체 울상
코로나19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벚꽃 축제를 기대했던 상인들은 이른 개화가 야속하기만 하다. 계룡산 동학사 인근에서 30년째 점포를 운영한 이모(70)씨는“과거에는 벚꽃 철에 공주 시장도 오고 음식도 많이 나누는 큰 장이 섰다. 이제는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시에서도 벚꽃철 맞추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벚꽃 축제를 여는 지자체들은 비상 대응 체제를 꾸렸다. 벚꽃이 평년보다 14일 빨리 개화한 충북 청주시는 벚꽃 명소인 무심천변에 관광객이 몰리자 지난 25일부터 안전요원을 투입했다. 충청북도는 이달 31일부터 다음 달 16일까지 관광객이 몰리는 벚꽃 명소 5곳을 대상으로 안전 점검에 나서기로 했다. 서울 영등포구는 여의도 윤중로 벚꽃길에 오는 31일부터 주말까지 질서 유지를 위한 안전요원 341명을 투입하기로 했다. 윤중로 벚꽃 축제 기간 도로 통제는 4월 3~10일까지로 예정돼 있지만, 벚꽃이 지난 26일 공식 개화를 시작해 주말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통상 지자체의 축제 일정은 최소 한 달 전에 계획한다. 3월 초쯤 민간 기상정보업체의 봄꽃 개화 예측 시기를 토대로 한다. 벚꽃은 개화 후 일주일 뒤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이를 고려해 예상 개화일 2~5일 뒤를 축제 시작일로 잡는다. 민간 기상정보업체 케이웨더 측도 올해 벚꽃 개화 예상 시기를 평년보다 4~7일 빠를 것으로 예상하긴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이상 고온이 3월에 이어져 개화 시기가 더 앞당겨졌다. 지자체의 한 관계자는 “미리 잡아 놓은 축제 일정을 날씨의 변화에 따라 바꾸기는 현실적으로 무리다. 날씨 예측이 어려워질수록 앞으로 행사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한 셈”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도 민간 기상업체들이 인공지능(AI) 기술까지 동원해 해마다 벚꽃 개화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일본 기상청은 2007년에 개화일 예측이 크게 빗나가면서 공식 사과했고, 2010년부터는 벚꽃 개화 예상일 발표를 중단했다.
21세기 후반 대구서 2월에 벚꽃 필 수도
21세기 후반이 되면 벚꽃이 2월에 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상청이 우리나라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른 봄꽃 3종(개나리, 진달래, 벚꽃)의 개화일을 분석한 결과, 개화 시기의 변화 속도가 과거보다 빨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60년 동안(1950~2010년대) 봄꽃 개화 시기는 3~9일 당겨졌지만, 지금과 같은 온실가스 배출 등의 상황이 이어지면 21세기 후반 봄꽃 개화 시기는 23~27일 당겨질 것으로 예측됐다. 대구의 경우, 벚꽃이 2월 27일에 피는 등 3종 모두 2월 말에 개화할 것으로 예상됐다.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개화가 빨라진다는 건 지구의 기능이 무너지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라며 “개화와 벌의 수분 매개, 농작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의 관점에서 보면 때 이른 개화는 생태계의 식량 서비스 저하, 나아가 인간의 식량 위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