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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놀이 영토’를 넓히는 새들을 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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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고진하 시인

고진하 시인

지금은 완연한 봄이지만 지난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우수 경칩이 지나고도 추위는 계속되었다.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이어지는 산책길에 개울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얼음이 다 녹지 않아, 청둥오리나 백로 같은 새들이 얼음 풀린 작은 웅덩이에서 놀고 있었다. 사람들 같으면 놀이터가 좁다고 투덜거리겠지만, 새들은 빨간 맨발로 물속에 뛰어들어 먹이를 잡고 그러다 물 밖으로 나와 푸르르 푸르르 젖은 날개를 털곤 했다.

어떤 녀석들은 그 좁은 웅덩이에서도 서로 등짝을 타고 올라 짝짓기를 하기도 했다. 멀찍이 서서 새들의 유희를 관찰하다 보면, 그렇게 물속에서 놀며 잔물결을 일으켜 차츰 얼음을 녹여 자기들의 놀이 영토를 넓히는 모습이 매우 성스러워 보였다. 물론 새들의 그런 움직임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겠지만, 지구 생명들이 살아갈 건강한 터전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생존과 놀이가 동반된 그들의 활기찬 모습은 내 가슴에도 성스러운 파장으로 와 닿았다.

새들에겐 생존과 놀이가 하나
지금도 아련한 어릴 적 썰매터
봄맞이 꽃밭 일구는 작은 행복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내 삶에도 저런 성스러운 공간이 있었던가. 까마득한 추억 한 장면. 눈과 얼음으로 덮인 논배미에 나가 썰매를 타고 놀던 어린 시절. 손발이 꽁꽁 얼어붙는 것도 모르고 썰매를 타고 놀다가 놀이 영토를 더 넓힐 욕심에 친구들과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논배미로 끌어들이기도 했었다. 이튿날 썰매를 들고 나가 보면 씽씽 썰매를 지칠 얼음판이 더 넓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무척 기뻐하곤 했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놀이를 하듯 하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려면 장난감이 있어야 하고, 놀이 공간이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자신의 삶에 깃든 신화를 밝혀내려고 결심했을 때 그는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 하던 놀이가 무엇이었지?”

어린 융이 즐겨 했던 놀이는 돌멩이를 주워다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오래전 놀이의 추억을 소환해 공터에다가 돌멩이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좋은 집을 갖고 있었음에도 그가 그렇게 손수 집을 지은 것은 그것이 바로 성스러운 공간을 창조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라고! 그의 집짓기는 부동산을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한 놀이였던 것!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이런 융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덧붙인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하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신화와 인생』)

나는 그날 얼음이 덜 풀린 개울에서 놀이 영토를 넓히는 새들을 보고 돌아와,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풍물시장으로 갔다. 풍물시장은 무척 북적였다. 날씨가 풀렸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 꽃씨를 사러 왔지만,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꽃씨 파는 가게로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꽃씨를 파는 가게에 겨우 도착한 나는 텃밭 가에 심을 꽃씨를 여러 종 샀다. 꽃씨를 싸 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중얼거렸다. 오 꽃씨를 사오는 사치라니!

봄기운이 확연히 느껴지는 날, 나는 호미를 들고 나가 텃밭 가의 땅을 파고 꽃씨를 뿌렸다. 키 작은 채송화부터 분꽃, 백일홍, 그리고 키 큰 해바라기까지. 다 심고 나니 올해 내가 보고 즐길 놀이터가 상상으로 그려졌다. 어릴 적 놀이터는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지만, 이제 늘그막에 몇 평의 살피꽃밭이 있는 별서(別墅)에 사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나이 듦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불만의 수위보다 자족의 수위를 높일 수 있으니까. 기력은 젊을 때보다 현저히 떨어졌지만, 내게 주어진 현실을 흔감하는 긍정의 지혜는 상승하니까. 내 마음을 낙원의 기쁨으로 채우기도 하고 지옥의 나락에 떨어지게도 하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변화의 ‘예스’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때도 내가 살아 있지 않으면 겪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아닌가 생각하면 시난고난한 순간들도 잘 견뎌낼 수 있다.

나는 꽃씨를 다 심고 들어와 호미를 농기구 창고에 걸어둔 뒷마당에 서서 붉은 황혼이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 제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한 무리 새들이 보였다. 나는 새들을 바라보다가 그냥 혼자 중얼거렸다. 행복이 뭐 별거야? 찧고 까불며 신나게 놀다가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는 것!

고진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