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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일본 총리 논란…전쟁 중 우크라에 ‘필승 주걱’ 선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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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밥과 함께 태어난 이것. 그렇다. 밥주걱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주걱의 출현은 무려 4~5세기경으로 올라간다. 경주 금관총에서 솥이 출토되었으니 이때쯤 밥주걱도 만들어졌으리라는 추측이다. 처음엔 나무로, 그러다 고려시대쯤 놋쇠로도 만들어졌다.

1980년대 가보를 소개하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 팔순 지난 할머니가 “요즘 사람들은 물건을 헤프게 쓰는 것이 안타깝다”며 보자기에 고이 싸서 들고나온 것이 놋쇠 주걱이었다. 4대째 물려받아 사용해 지름이 15㎝였던 것이 닳고 달아 2㎝도 남지 않았지만 TV에 나올 자랑할만한 가보였던 거다.

최근 일본에서 이 주걱이 연일 화제에 올랐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66) 일본 총리가 우크라이나에 가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선물한 게 계기가 됐다. 선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 주걱에 필승(必勝)이라 적은 게 파문을 일으켰다.

지난 21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UPI=연합뉴스]

지난 21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UPI=연합뉴스]

지난 24일 참의원 회의에서 야당 의원이 따지듯 말했다. “일본이 해야 할 일은 평화를 어찌하느냐지 필승은 부적절하다.” 인도 순방 마지막 날 밤,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을 빠져나오고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열차에서 혹여 동선을 들킬까 봐 휴대폰 전원을 모두 끄고 전파마저 차단하는 기기에 휴대폰을 넣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 이 모든 수고로움이 한 번에 날아간 순간이었다.

기시다 총리가 건넨 그 주걱은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히로시마현 미야지마(宮島)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의 명물. 러·일전쟁 당시 전쟁터로 나서는 군인들이 이곳에서 무사 귀환을 바라며 주걱을 바쳤다고 한다. 일본 제일의 나무주걱 생산지이자 판매지인 이곳에선 지금도 필승 외에도 합격이나 장수 같은 문구가 새겨진 주걱이 팔리고 있다.

난데없는 필승 주걱 논란, 여기에 빠진 건 마음이다. 전쟁에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배려 말이다. 주걱에 적힌 말이 평화였더라면 이런 논란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터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으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피폭 실상을 알리겠다”며 기시다 총리는 오는 5월 히로시마에서 주요 G7(주요 7개국) 회담을 연다.

일본은 고심 끝, 윤석열 대통령도 초청한다고 밝혔다. 히로시마에서 양국 정상이 두 달 만에 만나는데, 뭔가 불편함이 가시질 않는다. 왜 원자폭탄이 투하됐으며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사망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우크라이나에 ‘필승’ 구호를 선물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