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싼 비용으로 예금을 유치하고, 이를 다시 투자해 돈을 벌던 시대가 끝나간다.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로 은행 신뢰에 의문이 생기면서, 더 높은 수익의 더 안전한 투자처로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어서다. 이런 ‘탈(脫) 은행’ 움직임은 일부 중소은행의 비용 부담으로 돌아가 또 다른 금융 불안의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번 달(23일까지 집계) 미국 머니마켓펀드(MMF)로 들어간 자금이 2860억 달러(371조800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월간 기준으로 2020년 4월 이후 최대 금액이다. 2020년 4월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금융 불안이 높던 시기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MMF는 단기 미 국채 등 저위험 투자처에 돈을 맡겨, 수익을 내는 단기 금융 상품이다. 은행 예금처럼 입·출금이 비교적 자유롭다. 특히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수익률 올라가 이자를 거의 주지 않는 수시입출금식 은행 예금 금리보다 높다.
MMF로 자금 유입을 촉발한 것은 SVB 파산 등 최근의 ‘은행 위기’다. 여기에 미국 중소형은행과 스위스의 크레디트스위스를 무너뜨린 유동성 위기가 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로 전염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도이체방크는 지난주 마지막 거래일인 지난 24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증권거래소에서 전날보다 8.53%(0.8유로) 떨어진 8.54유로에 마감했다. 장중 한때 14% 넘게 떨어지기도 했다. 상업부동산 비중이 높고 헤지펀드가 불안 심리를 이용해 은행주 하락에 집중 베팅하면서 불안감이 증폭됐다.
은행 예금의 안전성이 흔들리자, 보다 안전하고 더 높은 수익률을 주는 상품으로 자금이 급속히 빠져나갔다. SVB 사태가 불거지기 시작한 9일 이후 골드만삭스의 MMF 자금은 과거보다 약 13%(520억 달러) 늘었다.
대표적 안전자산인 금도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았다. 27일 뉴욕상업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20일(현지시간) 금 가격은 온스당 2000달러를 넘어 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최근 온스 당 1900달러 수준으로 가격이 소폭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 중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SVB사태로 자금이 예금에서 다른 안전 자산으로 쏠리면서, 그동안 은행들이 이자를 거의 주지 않고 유치했던 이른바 ‘이지 머니(easy money)’도 감소하게 됐다. 낮은 이자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돈을 맡겼던 이유가 안전성 때문인데, 최근에 이 부분이 흔들리고 있어서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따르면, 은행의 대표적 ‘이지 머니’인 무이자 예금이 전체 예금에서 차지 하는 비중은 최근 30%대에서 20%대로 감소했다. 무이자 예금은 1990년대엔 15%대에 불과했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30%대까지 급증했다. 특히 대형 은행보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중소은행이 자금 이탈의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 24일(현지시간) 이번 달 3주차(9~15일) 미국 은행 전체 총 예금은 전주 대비 980억 달러가 감소했다. 미국 소형은행의 총 예금은 1200억 달러 줄었지만 미국 25개 대형은행의 총 예금은 670억 달러 늘었다.
자금력이 달리는 중소은행은 ‘이지 머니’ 감소로 조달 비용이 높아지면서 부담이 커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무이자 예금 비중이 과거 평균 수준으로 돌아가면, 약 1조 달러의 자금이 빠져나간다”면서 “(자금 유치를 위해) 은행이 수십억 달러의 이자 비용을 늘려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닐 카시카리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27일 “은행과 대출자들이 불안해해서 자본시장이 (사실상) 계속 닫혀있게 되면 경제에 더 큰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이번 SVB사태로 경기 침체가 이전보다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한편 27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중소은행인 퍼스트시티즌스뱅크셰어스가 파산한 SVB를 인수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