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에 어린 4남매 참변…엄마는 그대로 혼절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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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차림으로 다니다보니 한국 사람들이 좀 무시하고, 해코지도 하고 했지만 그래도 활발하고 성실했어요.”

27일 경기도 안산 선부동 다세대주택에서 발생한 화재로 자녀 4명을 잃은 A씨(55) 가족을 정정자 세계사랑교회 목사는 이렇게 기억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A씨 가족의 한국 적응을 도왔다는 정 목사는 “우리 딸들이 그 집 애들을 참 좋아해서 같이 바깥에 놀러도 다니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지…”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A씨 가족의 삶을 잿더미로 만든 불은 이날 오전 3시 28분쯤 시작됐다. A씨가 살던 2층 투룸(21㎡) 거실의 멀티탭에서 화재가 발생한 걸로 소방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40여분이 지난 뒤 불은 완전히 꺼졌지만,  A씨의 11살·4살 난 딸과 7살·6살 난 아들은 잠을 자던 안방에서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일곱 식구 가운데 살아남은 건 A씨, 부인 B씨(41)와 그가 창문을 넘어 몸을 피할 때 안고 있었던 2살 난 막내딸 달랑 셋이었다.

27일 오전 화재로 나이지리아 국적 어린이 4명이 숨지고 50대·40대 부부와 두살배기 막내딸이 다친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거주지. 이찬규 기자

27일 오전 화재로 나이지리아 국적 어린이 4명이 숨지고 50대·40대 부부와 두살배기 막내딸이 다친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거주지. 이찬규 기자

경찰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A씨는 거실에서 잠을 자다가 불이 난걸 인지했다. 이후 아내 B씨와 아이들이 있던 안방문을 두드린 뒤 맨발로 뛰쳐나가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했다. A씨는 물을 퍼나르며 불을 끄려는 시도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거센 불길에도 아이들을 구하려고 뛰어드는 A씨를 이웃들이 막아 세웠다. 맨발로 뛰어다닌 A씨는 발과 오른쪽 팔에 3도 화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옮겨진 이후 아이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B씨는 혼절했다고 한다.

2년 전 화재에 주거지 옮겼는데 또

A씨는 2008년 무역경영비자(D9)로 한국에 들어왔다. B씨도 남편을 따라 2012년부터 한국에 터를 잡았다. 부부는 한국에서 아이 다섯을 모두 낳았다. A씨는 폐기물 처리 업체나 재활용 업체 등을 돌며 가전제품이나 헌 옷 등을 사들였다. 이를 컨테이너에 실은 뒤 나이지리아로 보내는 일을 하며 일곱 식구의 생계를 꾸렸다.

A씨가 살던 집 근처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김구연씨는 “A씨가 B씨와 아이들이 먹을 초콜릿을 사러 자주 왔었는데, 옷차림은 허름했지만 가족끼리 행복하게 잘 살았던 걸로 기억한다. A씨가 한국말도 잘하고 아주 성실했다”고 말했다. 12년 전부터 A씨를 알고 지냈다는 나이지리아인 추쿠에메카(48)도 “그는 아주 강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절대로 무언가를 훔치지 않고, 일을 정말 열심히 했다”고 기억했다.

화마(火魔)가 A씨 가족을 덮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1월에도 A씨 가족이 살던 안산시 원곡동의 다세대주택 지하 1층에 불이 난 적이 있다. 30여분 만에 진화됐지만, 당시 5살이던 첫째 아들이 목 부위 등에 2도 화상을 입었다. 아내 B씨와 둘째 딸(당시 4세), 둘째 아들(당시 2세)도 연기를 흡입해 병원 치료를 받았다. 당시 소방당국은 거실 벽 스위치에서 불이 시작된 점을 봤을 때 전기적 요인에 의해 화재가 난 것으로 원인을 추정했다.

27일 오후 나이지리아 정부 관계자와 알리 모하메드 마가시 주한 주한나이지리아 대사가 화마로 자녀 넷을 잃고 고대안산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나이지리아 국적 부부를 위로한 뒤 안산나이지리아공동체 자국민들과 후속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27일 오후 나이지리아 정부 관계자와 알리 모하메드 마가시 주한 주한나이지리아 대사가 화마로 자녀 넷을 잃고 고대안산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나이지리아 국적 부부를 위로한 뒤 안산나이지리아공동체 자국민들과 후속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불이 난 건물에는 A씨 가족 외에도 나이지리아와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을 포함한 이웃 37명은 제때 대피해 목숨을 건졌다. 안산 일대 외국인 정착을 지원하고 있는 박천응 안산다문화교회 목사는 “건물이 많이 낙후됐지만, 집값이 매우 저렴해서 외국인들이 끊이지 않고 유입되는 곳”이라며 “러시아 출신 고려인 3세들, 아프리카 출신 외국인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불이 난 다세대주택 안에는 주택용 소화경보기나 소화기 등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A씨 부부가 입원한 병원을 찾은 주한 나이지리아 대사관 관계자는 “비극적인 일이 생겨서 너무나 슬프다. 나이지리아 대사관과 커뮤니티가 이 슬픔을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안산시는 화재가 발생한 건물에 살던 이들을 안산시청에서 마련한 별도 거주시설로 옮기도록 했다.

27일 오전 3시28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의 한 빌라에서 난 화재로 나이지리아 국적 어린이 4명이 숨지고 부부와 3명이 다쳤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27일 오전 3시28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의 한 빌라에서 난 화재로 나이지리아 국적 어린이 4명이 숨지고 부부와 3명이 다쳤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물건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는 한편, 목격자 및 거주자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이며 정확한 화재 원인을 파악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 중이며, 숨진 사망자의 시신 역시 부검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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