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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처럼 전액 예금보호? 위기땐 가능하나, 문제는 모럴해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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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시그니처은행 파산 이후 국내외에서 ‘예금 전액보호’ 조치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최근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예금 전액보호 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취지로 말하자 뉴욕증시가 폭락하는 등 시장이 동요하기도 했다. 옐런 장관이 바로 다음 날인 23일(현지시간) 미 하원에 출석해 “(은행 위기의) 전염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취해야 할 중요 도구들을 사용했고, 이러한 도구들은 다시 사용할 수 있다”며 예금 전액보호 방침을 재확인하면서 다소 안정을 되찾았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은 커졌다. 이러한 오락가락 행보의 배경에는 예금 전액보호가 금융 안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만큼이나 부작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SVB사태가 남긴 교훈은 예금보호한도 이상의 큰돈을 맡긴 개인이나 기업이 위기 징조에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을 하는 순간부터 진짜 금융위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 당국은 한두 곳의 위기가 다른 곳으로 전염되는 걸 조기에 차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고 예금 전액보호 카드를 꺼내들었다. 다만 금융회사가 건전성 관리에 소홀하는 등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부작용으로 꼽힌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SVB 사태와 유사한 상황이 국내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 예금 전액보호 조치가 가능한지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우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예금자보호법 시행령을 개정해 현재 5000만원까지인 예금보호한도를 전액으로 상향하는 방법이 있다. 1990년대 외환위기 당시 시행령을 개정해 1997년11월부터 2000년 말까지 전 금융회사 예금을 전액 보호 조치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 논란에 휩싸이며 1998년 7월 조기 종료됐다. 정부는 당시 예금보험기금(당시 신용관리기금)에 정부 보유 주식 7조5000억원을 출연하는 등 대규모 공적자금(세금)을 투입했는데 아직도 구멍을 메우는 중이다. 2027년까지는 은행 등이 예보에 납부하는 특별기여금(매년 부보예금의 0.1%)을 통해 다 채워 넣는다는 계획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미국처럼 개별 은행 예금에 대해 전액 보호를 하는 것도 전례는 없지만, 금융시장 위기 시에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미국 SVB, 시그니처은행처럼 개별 은행 예금 전액을 보호하는 것도 필요하다면 시행령 개정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며 "건실한 금융회사가 부실 회사의 일부 우량 자산과 부채를 대신 떠안아주는 '계약이전'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특정 은행의 파산이 광범위한 금융권 리스크를 초래할 경우’ 보증 한도(25만 달러)를 초과한 예금도 보호할 수 있다는 연방예금보험법 조항을 이용해 SVB와 시그니처은행의 예금을 전액 보증했다.

문제는 예금 전액보호가 금융회사의 방만경영을 부추겨 더 큰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인도 중앙은행 부총재 출신인 비랄 아차리아 뉴욕 경영대학 교수는 “과거 경험을 통해 봤을 때 예금 전액보호는 ‘좀비 은행’을 양산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95년 6월부터 2000년 3월까지 약 5년간 예금 전액보장 특례조치를 시행했던 일본 등을 거론하며 “예금 전액보호 조치는 중소은행에 예금이 더 많이 모이게 하기보다 이들이 부실 채권 투자를 늘리는 식으로 더 큰 위험을 감수하게 했다”고 꼬집었다.

국내에서도 이런 부작용 때문에 예금 전액보호 제도 마련에 앞서 한국 금융의 '약한 고리'인 저축은행, 지방은행의 건전성 제고 방안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병호 한국금융연구원 금융혁신연구실장은 "예금 전액을 보호해주면 일부 은행은 정부만 믿고 방만경영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예컨대 자동차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사고가 나면 보상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인데, 그러다보면 보험사 역할을 자처한 정부기관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민환 인하대 글로벌금융학 교수는 “예금 전액보호는 사실상 소수의 부자들만 혜택을 보는데다 대형은행만 더 이득을 보는 ‘대마불사(too big to fail)’가 더 공고해질 우려도 있다"며 “무리하게 예금을 보호하려다 예보기금이 바닥나기라도 면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처럼 납세자의 부담이될 수 있는데, 차라리 은행 건전성 관리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고 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서는 건전한 은행이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로 결국 파산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파산한다면 남은 자산을 청산해 채권자들에게 돌려주는 '빚잔치' 과정에서 예보기금에 더 많은 손실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예금보험공사가 운용하는 예금보험기금(은행, 저축은행, 보험회사 등이 고객들이 매년 납부하는 예금보험료 적립금)에 '금융안정계정'을 설치해서, 은행 등 금융회사가 유동성 위기를 겪는 등 위기 징조가 있을 때 선제적으로 금융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이를 골자로 지난해 12월 정부가 발의한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 정무위에 계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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