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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야당 대표주자 기소 눈 앞…차기 출마 가능해도 본선 불투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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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필규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미국 전직 대통령의 기소라는 초유의 사태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뉴욕시 맨해튼 대배심이 소집되면, 비공개회의를 통해 검찰이 제출한 증거 등을 심사한 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소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기소가 임박한 가운데 2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지검 앞에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한 여성이 "이제 시간이 됐다"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기소가 임박한 가운데 2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지검 앞에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한 여성이 "이제 시간이 됐다"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역사적으로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이 범죄 혐의로 법정에 간 적은 없다. 게다가 가장 유력한 공화당의 차기 대선 주자라는 점에서 트럼프의 기소는 미국 전역이 지켜보는 한편의 정치 드라마가 됐다.

지난 19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오는 21일 체포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날에 맞춰 지지자들의 항의 시위를 부추기기도 했다.

근거는 없었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위기에 인터넷에는 그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는 사진이 올랐다. 주황색 죄수복을 입고 수감된 사진도 공개됐는데, 모두 인공지능(AI)이 만든 ‘가짜 사진’이었다.

그러나 실제 기소가 되더라도, 사법당국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강제 구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반적인 의견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분석한 대로 “수갑을 찬 모습을 공개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지지기반을 결집하려는 게 트럼프의 전략”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기소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터넷 상에는 그가 체포되는 장면을 인공지능(AI)으로 합성한 가짜 사진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엘리엇 히긴스 트위터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기소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터넷 상에는 그가 체포되는 장면을 인공지능(AI)으로 합성한 가짜 사진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엘리엇 히긴스 트위터

3곳서 진행 중인 트럼프 수사

먼저 뉴욕 맨해튼 지검에서 수사하고 있는 것은 ‘스토미 대니얼스 사건’이다. 2016년 대선 직전, 자신과 과거 성관계를 했다고 폭로하려던 전직 포르노 배우 대니얼스의 입을 막으려고 13만 달러(약 1억7000만원)를 준 혐의다. 이 과정에서 개인 변호사 마이클 코헨을 중간에 거쳤는데, 이렇게 지불한 돈을 자신의 회사 장부에는 ‘소송 비용’이라고 조작해 쓴 것도 문제가 됐다.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지검에선 2020년 대선 직후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주 공무원들에게 압력을 가한 사건을 수사 중이다. 특히 조지아주 국무장관이던 브래드 라펜스퍼거에게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나에게 투표한)1만1780표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선거 사기 청탁과 허위진술, 공갈 등의 혐의로 8개월 동안 대배심이 진행됐으며, 이 역시 기소가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편 연방 법무부에선 특검을 임명해 2021년 1월 6일 의회 폭동 당시 지지자들 선동한 혐의와 퇴임 후 기밀문서를 유출한 혐의에 대해 수사를 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기업 관련 자산을 부풀리는 등 사기를 벌였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이를 통해 대출을 받거나 세금을 낼 때 특혜를 받았다는 것인데 이 역시 뉴욕 검찰에서 다루고 있다.

23일 트럼프 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이들 수사 책임자의 실명을 모두 공개했다. ‘위험한 존재’ ‘미치광이’ 등의 표현을 쓰며 “전부 해임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지지자를 동원해 수사에 압박을 넣으려는 이른바 ‘좌표 찍기’였다.

지난 19일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체포될 수 있다는 글을 올리자 이튿날 그의 자택인 플로리다 마러라고 앞에 모인 지지자들이 "트럼프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적힌 깃발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9일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체포될 수 있다는 글을 올리자 이튿날 그의 자택인 플로리다 마러라고 앞에 모인 지지자들이 "트럼프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적힌 깃발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기소돼도 출마는 가능

CBS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기소돼도, 심지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도, 이례적인 일이겠지만 대선 출마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도했다.

현재 미국 헌법상으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35세 이상 ▶미국 시민권자 ▶14년 이상 미국 거주자라는 3가지 요건만 갖추면 된다.

데릭 뮬러 아이오와 법대 교수는 “헌법에 명시된 내용 외에 의회나 정부가 어떤 (대선 출마)자격을 새로 추가할 수 없다”면서 “기소 여부가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리고 당선되는 것과 상관없다”고 말했다.

실제 1920년 간첩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노동운동가 유진 뎁스는 애틀랜타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채로 대선에 출마, 3% 이상의 득표를 했다. 대권에 여섯 차례나 도전한 린든 라로슈 역시 사기 혐의로 형을 살고 있던 1992년에 옥중 출마를 했다.

이 때문에 1.6 의회 폭동 이후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트럼프를 원천적으로 선거에 못 나오게 하려는 시도도 했다. 공직자가 폭동이나 반란에 가담하거나 적에게 원조를 제공한 경우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는 수정헌법 14조를 근거로 트럼프의 공직 출마를 막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체포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22일 뉴욕 트럼프타워 앞에는 그의 가면을 쓴 한 남성이 등장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따라하며 취재진과 관광객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체포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22일 뉴욕 트럼프타워 앞에는 그의 가면을 쓴 한 남성이 등장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따라하며 취재진과 관광객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침묵 지키는 현직 대통령

이번 맨해튼 지검의 수사를 두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바이든이 맨해튼 검찰을 불공정한 법무부 사람들로 채웠다”는 글을 올렸다. 사실상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정치 수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와 관련한 기자들의 돌발 질문도 무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기자들의 돌발 질문도 무시하고 있다. NBC는 트럼프의 기소를 두고 바이든에게는 “가시와 같은 유혹”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유력한 경쟁자에게 흠집을 낼 좋은 기회지만, 오히려 트럼프 지지자들의 반발을 키워 결집하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발언이든 정치적으로 해석돼, 자신이 임명한 메릭 갈랜드 법무장관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 보일 수 있다. 이미 미국 여론의 54%(로이터통신, 지난 20~21일)는 뉴욕 검찰의 수사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와 결이 다른 공화당 의원들도 “정치 수사”란 점에선 한목소리를 내고 있고, 일각에선 해당 검사를 의회 청문회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결집이 본선에까지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기소가 잇따르고 재판이 이어지면, 전체 유권자의 44%(지난달 갤럽 조사)나 되는 중도층이 트럼프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 전략가인 리암 도노번은 뉴욕타임스(NYT)에 “트럼프에 대한 기소가 경선 과정에선 그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바이든과의 본선에서는 타격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