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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휘저을수록(Churn) 맛과 향기가 풍부해지는 버터

중앙일보

입력

[퍼즐] 손장원의 영감을 주는 도구(1)

발악하며 불어대는 동장군의 꽃샘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봄동, 달래, 냉이, 전호나물, 다양한 두릅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이에 질세라 바다 향을 터질 듯이 품고 주렁주렁 열린 미더덕은 남해의 봄을 알리는 전령사이다. 봄비는 땅을 두드리고 얼어붙은 향기들을 퍼뜨리니 동면에 갇힌 오감을 깨우고 마음마저 휘젓는다.

스물세 살, 적지 않은 나이에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은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고 갈등과 타협이 반복되는 도시였다. 무채색 빌딩 정글 속에서 다름의 미학을 깨닫고 인생 절정의 시간을 보냈다. 반면 부모님이 정착하신 인근 코네티컷주 글래스턴베리의 작은 마을은 계절마다 다른 색이 입혀져 자연 변화와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때로 내가 뉴욕에서 갈팡질팡 헤매고 있을 때면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길은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미국 코네티컷주 글래스턴베리 로컬 농장의 가을 풍경 [사진 손장원]

미국 코네티컷주 글래스턴베리 로컬 농장의 가을 풍경 [사진 손장원]

미국 코네티컷주 글래스턴베리의 겨울 농가 [사진 손장원]

미국 코네티컷주 글래스턴베리의 겨울 농가 [사진 손장원]

미국 코네티컷주 글래스톤베리의 봄 들판[사진 손장원]

미국 코네티컷주 글래스톤베리의 봄 들판[사진 손장원]

미국 코네티컷주 글래스톤베리의 화훼 농장 [사진 손장원]

미국 코네티컷주 글래스톤베리의 화훼 농장 [사진 손장원]

일명 15번 도로, 뉴욕과 코네티컷주를 이어주는 메리트 파크웨이(Merritt Parkway)는 미 북동부 지역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다. 싱그러운 들판과 호수들이 일렬종대로 마주하고 봄기운으로 들뜬 주변 농장들은 파머스마켓 오픈 준비로 분주하다. 계절을 만끽하며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겨우내 멈췄던 대화의 장이 다시 열려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재잘거리는 봄 소리는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갓 재배한 농작물이나 이를 이용한 가공품들이 주를 이루지만 빈티지 그릇이나 정감 어린 수공예품들을 마켓에서 만나게 되면 한층 즐거움이 더해진다.

한번은 분주한 마켓 한편에 커다란 유리통을 장난감 삼아 놀고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Churn-craft’, 직역하면 ‘휘젓는 공예품’이라고 새겨진 유리병은 버터를 만드는 도구였다. 발명품은 아니었지만, 1920년대 가정에서 버터를 만들어 요리에 풍미를 더했던 도구를 재해석한 디자인이었다. 장인정신뿐만 아니라 재미와 옛 정서를 느낄 수 있는 훌륭한 디자인이었다.

1920년대 교유기(Churner)가 현대적 디자인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손장원]

1920년대 교유기(Churner)가 현대적 디자인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손장원]

원유에서 교유기를 이용하여 버터와 버터밀크를 분리한다. [사진 손장원]

원유에서 교유기를 이용하여 버터와 버터밀크를 분리한다. [사진 손장원]

어릴 적부터 요리를 좋아해 주방용품에 관심이 많았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자주 학교 프로젝트의 주제로 삼거나 특별한 소재나 모양의 도구들을 모으기까지 했다. ‘버터 만드는 교유기(Churner)’를 재현하게 된 이야기는 마음과 머릿속을 휘젓는 감동을 전했다.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이야말로 최고의 디자인인 것이다. 이웃 농장에서 받은 신선한 우유를 마시고 놀이처럼 휘저으며 만들어진 버터밀크는 쿠키나 디저트로 재탄생한다. 버터는 응축된 행복감으로 요리에 풍미를 더한다.

‘Churn’을 사전에서 검색하면 '속이 뒤틀리다','마구 휘돌다', 마케팅 용어로 '우왕좌왕하는 소비자' 등 부정적 의미가 눈에 띈다. 팬더믹과 함께 환경오염, 기후변화, 물가 상승, 전쟁 등등 지금 인류가 처한 비관적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싶다. 휘저을수록(Churn) 맛과 향기가 더 풍부해지는 버터를 음미해 보자. 쳇바퀴를 잠시 멈추고 내 안을 휘저어 볼 때이다. 낙관적이고 창의적인 생각들로 다시 채워지고 소소한 행복한 일상들이 펼쳐질 것이다.

불에 올린 버터가 노릇하게 끓고 헤이즐넛 향이 피어오르면 파프리카 파우더와 살짝 볶은 캐슈너트를 넣고 잘 섞는다. 카이막 치즈의 부드러운 고소함과 꾸덕꾸덕한 플레인 요거트의 산미가 조화를 이루면 그릇을 캔버스 삼아 붓 터치를 주고 녹은 향신료 버터와 과일들로 알록달록 색을 입힌다. 빵이나 크래커를 곁들이면 와인 한 잔과 함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무염 수제버터가 완성되었다. [사진 손장원]

무염 수제버터가 완성되었다. [사진 손장원]

수제버터, 카이막 치즈, 플레인 요거트, 캐슈너트, 과일을 이용한 와인 안주로 빵이나 난을 곁들여도 좋다. [사진 손장원]

수제버터, 카이막 치즈, 플레인 요거트, 캐슈너트, 과일을 이용한 와인 안주로 빵이나 난을 곁들여도 좋다. [사진 손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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