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와 금융 투기꾼이 만나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32호 21면

빈곤의 가격

빈곤의 가격

빈곤의 가격
루퍼트 러셀 지음
윤종은 옮김
책세상

2010년 1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선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노점상을 하던 청년이 분신자살을 시도한 일이다. 경찰의 과잉 단속에 대한 항의였다. 처음엔 아무도 몰랐다. 이 사건이 아랍 세계에 ‘재스민 혁명’을 촉발할 줄을 말이다. 청년은 얼마 뒤 세상을 떠났고 민주화 열풍은 순식간에 주변 국가로 퍼져 나갔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결국 엄청난 태풍으로 변한다는 ‘나비 효과’를 보여줬다.

이 사건의 충격은 아랍 세계로 제한되지 않았다. 중동·북아프리카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했다. 설상가상으로 홍수와 폭설 등 이상기후로 국제 곡물값도 뛰어올랐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소비자가 치솟는 물가로 고통을 받았다.

영국 다큐멘터리 감독인 저자는 색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본다. 현대 주요 사건의 근원을 따지고 보면 튀니지 청년의 비극과 연결돼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슬람 무장단체 IS의 발흥, 중동·아프리카에서 대규모 난민 발생, 유럽 극우정당의 부상,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등을 사례로 든다. 그는 겉으로는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사건까지도 포함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등이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서 지난해 여름 밀을 수확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서 지난해 여름 밀을 수확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저자는 이런 사건의 배후에는 원자재 가격 급등이 공통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그는 “높은 원자재 가격은 경제를 조정하면서 전 세계 곳곳에 혼돈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가격은 폭동과 혁명·전쟁을 일으키고 왕실과 경찰국가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자금을 댄다. 가격은 우리의 빗장을 열어 괴물을 풀어놓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원인은 무엇일까. 경제학자라면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설명하겠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실물의 수요·공급과 시장의 가격 변동은 별로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대신 파생금융상품의 과도한 쏠림이 원자재 가격을 비정상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여기엔 투기적 성향의 거래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는 “금융시장의 혼돈이 어떻게 현실 세계를 혼돈에 빠뜨리는지, 시장이 어떻게 다시 이를 반영하며 현실에 더 큰 혼돈을 불러오는지를 추적했다. 이 되먹임 고리에 동력을 공급하는 것은 투기라는 장치였다”고 말한다. 요약하면 금융시장 투기꾼들이 원자재 가격을 치솟게 하는 바람에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 이라크·우크라이나·케냐·베네수엘라 등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정치·경제적 위기로 일상이 무너진 빈민과 난민을 만나 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았다. 때로는 분쟁 지역을 현장에서 취재하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 묘사는 이 책의 장점이다.

한편으로 책의 중간중간에 묻어 있는 음모론적인 시각은 이 책의 한계다. 사회학 전공자인 저자에겐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인다. 금융시장에 투기적 거래가 존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투기적 거래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인 것처럼 몰아가는 건 다른 차원의 얘기다. 난민 캠프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누군가를 ‘악마화’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가격 결정론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결정론과 닮은 면이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경제적 하부구조가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주장을 폈다. 1991년 옛 소련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힘을 잃었지만 아직도 결정론적 세계관의 잔재는 남아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가격이 모든 걸 결정한다면 옛 소련이나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책 실패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사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원제 Price Wars.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