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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타협’ 압박 미 특사 마셜 “장제스·마오쩌둥 설득 자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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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8〉

일본 투항 후 중국에는 미군이 넘쳤다. 베이징을 상징하는 고궁 상공에 오가는 미군 항공기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사진 김명호]

일본 투항 후 중국에는 미군이 넘쳤다. 베이징을 상징하는 고궁 상공에 오가는 미군 항공기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공·맹(공자와 맹자)과 자본주의의 결합체였다. 명예욕이 강하고 자존심은 더 강했다. 울화통이 터져도 실명을 거론하며 상대방을 비난한 적은 없었다. 매일 밤 일기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 지휘관이나 고위 관료들의 무능함과 무책임에 불평을 표했을 뿐 심한 표현은 자제했다. 내전 초기 1년간 중국에 머물며 ‘국·공 타협’을 압박했던 미국 대통령의 특사인 마셜만은 예외였다. 말년에 한풀이하는 일기를 남겼다.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 패망 후 미 대통령 트루먼은 중국에 내전이 발발해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 덕에 극동에서 소련의 영향력만 느슨해지면 그만이었다. 대비책도 복잡하지 않았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장제스를 지원하되 중공과의 타협을 압박한다.”

“마오, 정권은 총구서 나온다 확신”

장제스와 마셜의 첫 만남. 1945년 12월 21일 난징. [사진 김명호]

장제스와 마셜의 첫 만남. 1945년 12월 21일 난징. [사진 김명호]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회담을 성사시킨 특사 헐리는 내전이 발발하자 사임했다. 후임을 물색하던 트루먼이 국무장관 번스에게 의견을 물었다. 번스는 스탈린을 만났을 때 들었던 얘기를 거론하며 마셜을 추천했다. “중국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마셜이라면 해결이 가능하다는 말을 스탈린에게 들은 적이 있다. 마셜은 몇 안 되는 정치가이며 군인이다.” 트루먼도 동의했다.

육군 참모총장을 사직한 마셜은 버지니아의 옛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트루먼의 전화를 받고 워싱턴으로 갔다. 트루먼과 국무장관 번스의 중국 특사 제안에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장제스가 양보하지 않으면 장을 포기할 생각인지 알고 싶다.” 트루먼이 답했다. “장제스의 지지를 포기하면 내전은 필연적이다. 중공이 중국의 반을 장악하고, 소련이 동북을 관할하면 미국의 태평양전쟁 참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두 번째 질문은 번스에게 했다. “중공이 양보를 거부하면?” 번스가 단언했다. “전력으로 장제스를 지지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과 부합된다.”

1946년 1월 마셜이 제안한 정전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미시위가 벌어졌다. [사진 김명호]

1946년 1월 마셜이 제안한 정전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미시위가 벌어졌다. [사진 김명호]

1차 세계대전 이후 마셜은 3년간 톈진(天津)에 주둔한 적이 있었다. 당시 중국은 엉망이었다. 요리 외에는 쓸만한 것이 없는 야만적이고,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이고, 야비하고, 뇌물을 좋아하고, 여자 속옷처럼 사연이 많고 복잡한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국가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버렸다. 중국인이라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장제스, 여자 외엔 악수하기 싫어해

중공 근거지 옌안에서 마오쩌둥과 함께 환영공연을 관람하는 마셜. 왼쪽 셋째가 장칭. [사진 김명호]

중공 근거지 옌안에서 마오쩌둥과 함께 환영공연을 관람하는 마셜. 왼쪽 셋째가 장칭. [사진 김명호]

마셜의 중국 파견이 결정되자 군통(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국장 다이리(戴笠·대립)가 장제스에게 보고했다. “마셜은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중요 군사전략의 결정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투를 지휘한 적은 없어도 영향력은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를 능가했다. 군사력으로 중공의 군대를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연합정부 수립과 헌정(憲政)을 통해 군대의 국가화를 강요할 것에 대비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속내도 주지시켰다. “마오는 국민당의 군대가 중국의 국군이라는 것을 부인한 적이 없지만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8년간 항일 전쟁 치르며 비축된 무장 역량을 썩힐 이유가 없다.” 권고도 잊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악수를 하시길 간곡히 권합니다.” 장제스는 다이리의 충정 어린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투항 후 장의 위상은 어마어마했다. 중국은 물론 아세아 전역에서 100년이래 최고의 영수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평소 여자 외에는 악수 하기를 싫어한 탓도 있지만 마주하면 오금이 저려서 감히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 지휘관이나 각료 중에 장제스와 악수 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1945년 12월 20일 원수 복장으로 상하이에 도착한 마셜은 수도 난징(南京)으로 직행했다. 이튿날 장제스와 악수를 하고 충칭(重慶)으로 날아갔다. 충칭에는 중공 연락 사무소를 겸한 ‘중공 남방국’이 있었다. 남방국을 이끌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둥비우(董必武·동필무), 예젠잉(葉劍英·엽검영)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서 사회 각계의 인사들과도 부지런히 만났다. 국·공 양당의 모순이 역사적 원인과 상호 불신임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 주중대사 스튜어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오판이 아니기를 기도해 주기 바란다.”

난징으로 돌아온 마셜은 장제스에게 정전을 요구했다. 거부하면 경제지원과 군사지원을 중지하겠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장은 병력을 수습해 린뱌오(林彪·임표)에게 맹공을 퍼붓던 두위밍(杜聿明·두율명)에게 공격 중지를 명령했다. 마셜은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도 방문했다. 평화를 갈구하는 마오쩌둥의 언변에 홀딱 넘어갔다. 정전에 동의한다는 마오의 확답에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도 장시간의 셰익스피어 희곡 얘기로 마셜을 홀렸다.

마셜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설득할 자신에 부풀었다.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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