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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노예 의사’ 필수과 전공의, 주 80시간 근무 개선해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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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호 32면

러브에이징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몇 년 전 인기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인데 대중적 공감을 얻어 지금까지 덕담처럼 사용된다.

어렵고 고된 일은 타인이, 즐겁고 재미있는 일은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기적 유전자를 타고난 사피엔스의 보편적 욕망이다. 불행히도 인간의 욕망은 무한대로 팽창하기 때문에 사회적 제재가 없으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대표적인 예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말하는 물건’처럼 취급하는 노예제다.

신석기시대부터 존재했다는 노예는 성경(창세기 43장 18절)이나 함무라비법전(기원전 18세기)에도 기록돼 있다. 다행히 근대 유럽에서 천부인권 사상이 확산해 노예제는 차츰 폐지됐고 지금은 전 세계가 국제법과 조약으로 금지한다. 물론 여전히 노동력과 성(性)을 불법으로 착취당하는 현대판 노예는 지구촌 곳곳에 존재한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피부과 등 선호

고대 문명사회에서 노예는 비록 주인이 물건처럼 매매는 하더라도 학대받으며 험한 일만 해야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가격도 비싸고 의식주를 제공해야 하는 고가의 재산이라 주인 입장에서는 노예를 적절히 대우하면서 ‘인간적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이익이다. 고대 바빌로니아만 보더라도 주인이 노예에게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준 뒤 전문적인 업무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사업가가 자신의 사업이나 재산을 친형제에게는 절대 맡기지 않았지만 노예에게는 임대한 노동자를 관리하고 감시하도록 했다.

노예의 직종은 다양했고 의사도 포함됐다. 신분은 노예지만 직업은 의사인 경우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법률』에서 ‘노예 의사’는 환자에게 병에 대한 설명도 안 하고 환자 말도 안 들으면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일방적인 처방을 내린 뒤 서둘러 다른 환자에게 가는 반면, ‘자유인 의사’는 질병 초기부터 환자와 충분히 상담해 환자가 의사의 치료를 믿고 따르도록 설득한다고 서술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400년이 지난 한국에서는 의사를 어떤 식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통상 의대 졸업 후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일반의, 이후 4~5년간 수련병원에 근무하는 전공의, 전공의 과정을 끝내고 전문의 자격증을 얻은 전문의로 구분한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중환자·응급 환자 등 생사를 다루는 필수 진료과 의사, 피부미용·성형·재활·상담 등 환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진료하는 의사로 나눌 수 있다.

필수 진료과는 환자가 밤낮없이 1년 365일 발생한다. 그런데 필수진료를 하면 원가도 보상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실제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에서 발표한 진료영역별 원가보존율 평균은 78.4%, 수술 및 처치 원가보존율은 77.6%다. 필수진료를 하다 생긴 손실은 비급여 진료로 채우라는 상황이다. 게다가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필수 진료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다가 돌발적인 상황이 생겨 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고의성이나 중과실이 없어도 업무상 과실치사(치상)죄를 묻기도 한다.

이렇듯 한국의 필수 진료과 의사는 ‘많이 일하고, 적게 벌면서, 형사처벌 위험도 감내해야’ 하는 의료계 3D 업종 종사자다. 의대 졸업생들의 기피과로 꼽힌 지는 30년이 넘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86세대’ 전문의들이 열악한 필수 진료과 현장을 지켜왔다.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수준의 후진국에 태어나 성장한 그들은 ‘위중한 환자를 살리는 게 진짜 의사’라는 자부심으로 필수 진료과를 선택했다. 전공의 때는 주당 100~120시간씩 일하면서 자신들을 ‘의료계 노예(Medical Slave)’로 불렀다. 당시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각자의 일터에서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장시간 고강도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형사처벌 위험도

이제 그들의 자리를 MZ세대 의사들이 이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중진국에서 태어나 선진 문화를 접하며 상대적으로 유복한 성장기를 보낸 이들은 다른 분야 동년배처럼 워라벨(일과 생활의 균형)을 매우 중요시한다. 당연히 필수 의료 분야 대신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한 피부과, 성형외과, 영상의학과 등의 전공을 선호한다.

왜곡된 의료시스템은 의료 선진국 한국에서 전공의들에게는 근로기준법 대신 ‘전공의 특별법’을 적용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 법의 핵심 내용은 주당 최대 80시간+8시간(교육적 목적) 근무와 36시간 이상 연속 근무 금지(응급상황은 40시간)다.

초대형 병원의 필수 진료과 전공의가 80시간을 근무한다는 것은 심신 건강을 해치는 수면 박탈(표 참조)이 일상으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일종의 현대판 노예 의사인 셈이다. 선진국 전공의는 교육생이라도 근무조건은 일반 근로자와 비슷한데 유럽은 주당 48시간 정도 일한다. 미국은 주마다, 전공마다 차이가 있지만 전공의를 혹사하는 환경은 아니며 전공의에게 24시간 이상 연속 근무를 시키는 것은 금지돼 있다.

지난 6일 고용노동부는 주당 최대 69시간까지 근무하는 근로기준법 개편안을 제시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런데 유독 대한전공의협의회는 “개편안을 환영한다”면서 전공의에게 우선 적용해달라고 요구했다.

21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는 건강 보호 차원에서 무리”라며 “MZ세대, 노조 미가입근로자, 중소기업 근로자 등 노동 약자와 폭넓게 소통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기회에 정부가 주 80시간 근무하는 전공의를 노동 약자 반열에 올려 선진국 전공의와 유사한 근무 환경을 조성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전공의 근무 환경을 선진국처럼 개선하려면 필수 의료 분야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동반돼야 한다. 만일 이번에 전공의협의회에서 던진 화두가 실행된다면 필수 의료 분야에 산적된 문제도 하나씩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의 길이 열릴 것 같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MIT에서 연수했다. 1994년부터 16년간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 ‘황세희의 남자 읽기’ 등 다수의 칼럼을 연재했다. 2010년부터 12년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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