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모차르트, 아들에게 올인 한 아버지의 명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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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호 28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요한 네포무크 델라 크로체 ‘모차르트 가족’ (1780년경). [사진 사회평론]

요한 네포무크 델라 크로체 ‘모차르트 가족’ (1780년경). [사진 사회평론]

한석봉의 어머니나 맹모삼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정작 그 어머니 본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자식을 위인으로 키워낸 그 누구의 어머니일 뿐이다. 그래도 본인이 쓴 글씨나 그림이라도 남긴 신사임당은 좀 낫다고 해야 할까. 음악사에도 본인의 이름보다 자식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부모가 적지 않다. 그중에서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따라갈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전설적인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신동의 아버지’ 인생 살기로 결정

아버지로서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어떤 이들은 그가 가혹하리만큼 권위적이고 엄격했으며 아들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했던 아버지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성인이 되어서도 철없이 구는 천재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바친 헌신적인 아버지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누가 맞는지 진실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둘 다 레오폴트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미묘하고 복잡한 가족관계를 남들이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으랴.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해박하고 유식한 사람이었다.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대대로 책을 제본해온 장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지역 예수회 학교에서 논리학과 과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그곳을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가톨릭 사제나 신학자의 길을 가기를 원했다. 부친의 유지를 따라 잠시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그는 철학과 법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고, 후원이 끊기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틈틈이 익혔던 바이올린 실력을 바탕으로 한 백작의 시종으로 들어갔고, 34살이 되었을 때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전 오케스트라의 네 번째 바이올린 주자로 취직했다. 우직하고 철저한 성품 덕에 신임을 얻어 1년 후에는 합창단원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도 맡았다.

모차르트의 첫 즉흥 연주를 악보로 옮긴 안단테 C장조 K.1a (1762). [사진 사회평론]

모차르트의 첫 즉흥 연주를 악보로 옮긴 안단테 C장조 K.1a (1762). [사진 사회평론]

그는 38살에 늦은 결혼을 했고 일곱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그중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과 볼프강 모차르트만 살아남았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1756년에 레오폴트는 바이올린 연주에 대한 일종의 교과서인 『바이올린 연주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또한 작곡에도 재능을 보여 ‘장난감 교향곡’을 비롯해 여러 곡을 작곡했다.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던 레오폴트의 커리어는 어느 순간 갑자기 중단된다. 두 자식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한 순간부터다.

레오폴트는 난네를이 7살이 되자 처음 음악을 가르쳤는데, 딸은 놀랄 만큼 빠르고 쉽게 음악을 익혔다. 하지만 그에게 더 충격을 준 것은 누나가 음악을 배우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던 3살짜리 모차르트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배우지도 않은 악기 연주를 척척 해내고 작곡까지 하는 걸 보고 그는 이것이 “신이 잘츠부르크에서 일으킨 기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는 이 기적을 넓은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직접 여행 일정을 짜고 연주회를 기획했다. 처음에는 뮌헨과 빈 같이 잘츠부르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를 두세 달 정도 다녀오는 일정이었으나 여행지는 점점 넓어졌고 기간도 훨씬 길어져서 결국 유럽 순회 여행이 되었다. 천재 남매의 공연에 대한 반응이 예상보다도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첫 순회공연은 무려 3년 5개월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이 여행으로 모차르트 가족은 거금을 벌었고 이제 천재 남매의 공연은 가족 비즈니스가 되었다. 공연지는 독일 내의 주요 도시뿐 아니라 브뤼셀, 파리, 런던, 헤이그, 암스테르담의 궁정이었고 청중은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이들의 연주는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으며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믿기지 않을 환대를 받았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는 모차르트를 자기 테이블에 불러 같이 식사를 했고, 영국 왕 조지 2세는 마차를 타고 가다가 마주친 모차르트 가족에게 머리를 내밀어 손을 흔들어 주었다고 한다.

여행은 모차르트에게 커다란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유럽의 선진 도시를 다니며 그곳에서 기라성 같은 음악의 대가들을 만났고 그곳의 첨단 음악들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레오폴트는 어린 자식을 내세워 돈벌이를 하러 다닌 것이라기보다 어린 아들의 유학길에 보호자로 따라나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레오폴트는 여행 중에도 아들에 대한 교육은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챙겼다. 당대 대가들의 작품을 공책으로 엮어서 아들에게 익히도록 하고, 아들이 작품을 떼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일일이 점검하고 이를 기록했다. 음악뿐 만이 아니라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에게 수학, 문학, 외국어 등도 직접 가르쳤다. 평생 학교에 가본 적이 없는 모차르트가 아는 모든 지식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하지만 얻은 게 많은 만큼 잃은 것도 적지 않았다. 레오폴트가 기획한 여행 스케줄은 항상 무리가 있어서, 모차르트는 여행 중에 자주 아팠다. 9살 때 헤이그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다섯 달 동안 내리 앓았고, 11살 때는 빈에서 천연두를 앓았다. 모차르트가 평생 병약했던 이유는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에 감당했어야만 했던 무리한 여행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가 잘츠부르크의 집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았다. 여행 동안 제대로 먹거나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해서였을까.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163㎝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키가 작았다. 그런데도 레오폴트는 아이들이 성장해서 신동이라는 상품성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을 계속 다녔으며, 심지어 더 많은 주목을 받으려고 아이들의 나이를 한 살씩 줄이곤 했다.

헌신과 집착, 두 얼굴의 아들 사랑

피에트로 안토니오 오렌초니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초상화’ (연대 미상). [사진 사회평론]

피에트로 안토니오 오렌초니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초상화’ (연대 미상). [사진 사회평론]

이런 유년 시절을 보낸 모차르트에게 또래 친구가 한명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어린 모차르트에게는 아버지 레오폴트가 선생님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그리고 레오폴트 역시 ‘신동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직업이자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아이는 반항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했다. 아이는 오래도록 그렇게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듯 보였다. 사람들은 이 순진무구한 천재를 “영원한 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것은 아들의 인생에서 밀려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아버지가 만들어낸 허상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이제 아들은 자기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기를 원했고 그럴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오랜 시간 신처럼 숭배하고 복종했던 아버지에 맞설 배짱도 생겼다. 아들은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빈에 남아 정착해버렸다. 오히려 빈에 자신의 미래가 있음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도 강행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멀어지길 원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 날 직전까지 수없이 많은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축복을 간청했다. 절연을 선언한 것은 오히려 레오폴트 쪽이었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견고하던 부자지간이 이렇게 끊기는 것을 많이 안타까워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의 삶을 살았고, 자신의 개성이 듬뿍 담긴 위대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부자는 모차르트의 아이가 태어난 후에야 다시 만났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고향 잘츠부르크에 간 것이었는데 아들은 몰라도 함께 데려간 며느리까지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그 후 아버지도 아들과 며느리가 사는 빈을 한 번 방문하기도 했다. 이때 비로소 레오폴트는 아들이 자기 힘으로 이루어낸 경이로운 성공을 목도할 수 있었다. 유럽 최고의 작곡가였던 하이든으로부터 엄청난 천재를 아들로 두었다는 편지를 레오폴트가 받은 것이 바로 이 때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혼자 살았고 곧 큰 병에 걸렸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모차르트가 슬픔에 찬 편지를 쓰기는 했지만 임종을 지키러 오는 것은 고사하고 장례식에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레오폴트의 마지막은 그렇게 외롭고 쓸쓸했다.

인생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레오폴트가 자기 자식과 가깝게 교류했다면 말년이 외롭지 않았을까. 아니 그가 자식을 위해 살지 않고 작곡가이자 이론가로서 자신의 경력에 충실했다면 더 행복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는 자기의 곡이 아니라 자식을 작품으로 남기는 인생을 택했다. 선택의 결과는 좋든 싫든 오롯이 그의 몫이리라.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천재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그에게 감사하지 않으랴. 부자간의 굴곡진 애증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음악은 여전히 산뜻하고 아름답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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