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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은행 ‘규제 포획’의 그늘, 진입 장벽 탓 안일한 경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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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호 10면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영국의 은행 제도에 실망해 스스로 은행을 세운 데이브 피시위크. [사진 데이브뱅크]

영국의 은행 제도에 실망해 스스로 은행을 세운 데이브 피시위크. [사진 데이브뱅크]

어느새 15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경제학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사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높은 물가 상승의 근원을 찾고 찾아서 올라가면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연준(Fed)이 시행한 양적완화가 있다. 당시에 풀린 돈을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이다. 즉 우리는 아직도 금융위기의 영향 아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은 높은 이익을 노린 미국의 금융업체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위험한 금융 상품을 만들었다가 주택 가격의 거품이 꺼지면서 시작된 것이다. 은행을 비롯한 미국의 금융업체는 눈앞의 이익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주택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에게 정말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돈을 빌려줬다. 이런 금융업체의 무책임한 행동을 허용하면 어떤 경제적 재난이 올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건인 동시에 이런 민간 업체들에 모든 판단을 맡기면 안 되고 정부가 나서서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안겨줬다.

규제 기관과 기업이 같은 편 되는 현상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런데 이런 교훈을 모두가 마음 깊이 되새기고 있을 때 나를 놀라게 한 작은 사건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영국의 작은 도시 번리(Burnley)라는 곳에서 미니 버스 사업을 하던 데이브 피시위크(Dave Fishiwick)는 영국의 은행 제도에 실망해 자기가 스스로 은행을 만들려고 했다. 피시위크가 은행을 세우기 위한 과정을 BBC 방송에서 ‘데이브의 은행(Bank of Dave)’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방송한 것이었다. 일단 피시위크는 번리 시의 작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 영국의 대형 은행에 대출 신청을 했지만 모두 거절당하는 것을 봤다. 피시위크의 미니버스를 구매하는 주요 고객들이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이었다. 이들에 대해 잘 아는 피시위크는 거대 은행이 제대로 심사도 하지 않고 대출을 거절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은행을 세워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결심한다. 영국의 대형은행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문대 졸업생들을 채용해 우리 돈으로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의 연봉을 주고 있지만 그 직원들은 막상 영국의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에 분노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은행을 세워서 예금 금리를 다른 은행들에 비해서 훨씬 높은 연 5%를 주면서 확보한 돈으로 번리의 유망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 대출을 해줬다. 물론 이 은행의 직원은 해당 지역 출신의 젊은이 두세 명이었고 그들의 봉급은 대형 은행 직원에 비할 수 없이 낮았지만 피시위크의 이 은행은 영국의 대형 은행들보다 많은 수익을 창출했다.

그런데 피시위크의 고생은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됐다. 영국의 은행 감독 기관들이 피시위크의 은행 운영 방법이 불법이라고 경고를 하고 영업을 정지시켰다. 그래서 피시위크가 국회의원들도 찾아가고 방송에도 등장해서 영국 금융 감독 기관들의 답답하기 그지없는 규제를 비판한 끝에 결국 우리로 치면 ‘번리 마을금고’와 같은 작은 은행을 세우게 된다. 결론적으로 영국 정부의 금융 감독기관은 다른 대형 은행들보다 더 높은 금리를 주고 예금을 받아서 거대 은행들이 대출을 거절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게 대출해 이익을 창출한 피시위크의 은행을 칭찬해 주지는 못할망정 각종 규제를 통해서 영업을 중단시키려 했던 셈이다.

재밌는 부분은 방송 중간에 피시위크가 미국을 방문해 누구든지 비교적 자유롭게 은행을 개설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을 보고 부러워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온다는 것이다. 미국은 금융권에 대한 감독이 소홀해서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그에 비해서 영국은 금융권에 대한 감독이 철저해서 미국보다는 수월하게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영국의 기업인들은 영국 정부가 지나치게 금융산업을 규제하고 간여해서 비즈니스를 하기 힘들다고 느낀다는 점이 의외였다. 실제로 영국의 거대 은행들은 모두 100년을 훨씬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다르게 생각하면 지난 100년간 새로 탄생한 은행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어느덧 관성에 젖은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것이 놀랍지도 않은 것이다.

경제학에는 ‘규제 포획(regulation capture)’이라는 용어가 존재한다. 198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 교수가 1971년에 발표한 ‘경제적 규제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Economic Regulation)’이라는 논문에서 이 규제 포획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원래 정부가 어떤 기업을 규제한다고 하면 그 기업이 국가 경제에 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잘 감시하고 지도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연히 기업의 입장에서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정부의 이런 규제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제하는 정부와 규제당하는 기업의 관계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정부와 기업이 같은 편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규제 포획이다. 즉 규제하던 정부 기관이 규제를 당하는 기업에 포획을 당한다는 의미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정부도 결국 사람인 공무원이 운영하는 기관인데 규제하는 기업과 관계가 오래되면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기업에서 공무원과 정부를 상대로 로비해 기업의 잘못을 눈감아 주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규제 포획인 것이다. 물론 규제 포획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 50년 전과는 달리 현대 사회는 모든 금전 거래가 투명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노골적인 금전을 통한 로비는 존재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업을 규제하는 공무원과 정부 기관의 입장에서는 어느새 규제당하는 기업의 편에서 옹호해줄 이유가 존재한다.

규제 심한 영국, 미국보다 성장 더뎌

영국의 은행 제도에 실망해 스스로 은행을 세운 데이브 피시위크. 그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 ‘뱅크 오브 데이브’. [사진 넷플릭스]

영국의 은행 제도에 실망해 스스로 은행을 세운 데이브 피시위크. 그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 ‘뱅크 오브 데이브’. [사진 넷플릭스]

비유를 해보자. 내가 어떤 말썽 부리는 중학생을 맡아서 감시하는 교사라고 가정해보자. 매일 오후에 남아서 그 말썽쟁이 중학생 제자를 감독하고 가르치는 것이 내 임무다. 그런데 그 중학생이 그래도 계속 말썽을 부리고 성적도 오르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제대로 교육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썽꾸러기 중학생 제자가 잘못하면 담당 교사는 그 중학생을 혼내기는커녕 그 중학생 제자의 편에 서서 옹호를 하게 되기 쉽다는 것이 바로 규제 포획이다.

실제로 조지 스티글러 교수가 조사를 해보니 규제를 시작한 기업이나 산업에서 새로운 경쟁자들이 진입이 현저하게 줄어들거나 아예 중지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부 기관이 어떤 은행을 규제하고 있는데 그 은행의 새로운 경쟁자가 들어와서 기존의 은행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올린다면 오랜 시간 규제를 하고 있던 공무원과 정부 기관의 입장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브의 은행이 성공하자 아마 영국의 금융 당국은 100년이 넘도록 정부의 감시를 받은 대형 은행이 지방 소도시의 작은 신설 은행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데이브의 은행 영업을 중지시키려 했을 수 있다.

최근 한국의 대형 은행들이 자신들이 안전한 지위를 배경으로 안일한 경영을 한다고 여러 곳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국과 같이 100년이 넘는 세월은 아니지만 한국의 은행들도 오랫동안 제대로 경쟁 은행의 신규 진입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는 새로운 은행의 진입을 권장하여 경쟁을 통해서 은행의 서비스를 높이자는 정책은 의미가 있다. 정부에서 공공성을 강조하고 나선 통신산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경쟁의 본질은 단순히 기업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패배해 도태되는 기업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아무도 도태되지 않고 패배하지 않는다면 긴장하여 열심히 노력할 기업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민과 정치권이 규제 포획에서 벗어나서 은행의 경쟁을 촉진하기를 원한다면 아주 가끔 내가 예금한 은행이 경쟁에서 패배해 도산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할 각오는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 큰 좌절을 겪었지만 결국 미국의 경제는 안정된 은행들이 이끄는 영국의 경제보다 항상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가끔 위기를 겪더라도 경쟁을 촉진해 성장을 목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성장을 희생하고 안정된 규제 경제로 갈 것인지를 온 국민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경제학 비타민』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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