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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55명" 일일이 이름 부른 尹...유가족·장병 모두 울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의 무력 도발에 맞서다 서해에서 전사한 55명 장병의 이름이 마침내 대통령에 의해 일일이 호명됐다.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묘역에 잠든 이들을 “영원한 바다 사나이이자 영웅 쉰 다섯분”이라며 이름을 불러보겠다고 했다. 이른바 롤콜(roll-call·이름 부르기) 방식의 추모로 역대 대통령으론 처음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서해수호 55용사 이름을 부르기 전에 울먹이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서해수호 55용사 이름을 부르기 전에 울먹이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입을 떼는 순간 눈물이 차오르며 코끝에 손등을 댄 채 25초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뒤 “누군가를 잊지 못해 부르는 것은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라며 고 윤영하 소령부터 고 한주호 준위까지 제2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격에서 희생된 55명 장병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불러나갔다.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20대 초반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전사자들의 얼굴이 연단 옆 대형 스크린에 나타났다.

김건희 여사가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윤석열 대통령이 서해수호 55용사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부르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김건희 여사가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윤석열 대통령이 서해수호 55용사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부르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슬픔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기념식에 참석한 희생자의 부모들은 또 눈물을 닦았다. 윤 대통령과 함께 기념식에 온 김건희 여사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롤콜을 마친 후 연단 뒤편에 서 있던 서해 참전 장병과 악수를 했다. 지난해 6월 대통령실 초청 오찬을 함께했던 이희완 해군 대령과 전준영 예비역 병장을 두 팔로 껴안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의 ‘서해수호의 날’과 문재인 정부의 ‘서해수호의 날’은 달랐다. 전사자들의 이름을 부른 것만이 다른 점은 아니었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에 맞서 서해를 수호한 용사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며 천안함 피격의 책임이 북한에 있음을 명백히 밝혔다. “우리 해군과 해병대 장병들은 수많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부터 NLL(북방한계선)과 우리의 영토를 피로써 지켜냈다”며 “북한의 무모한 도발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북한의 도발’이란 표현을 여섯 차례 썼다. 북핵의 고도화도 언급하며 “한국형 3축 체계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한·미, 한·미·일 안보 협력을 더욱 공고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마친 후 천안함 생존장병 전준영 씨를 포옹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마친 후 천안함 생존장병 전준영 씨를 포옹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5년의 임기 중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두 번(2020년·2021년) 참석했다. 지난해 기념식은 SNS 메시지로 대신했다. 문 전 대통령은 기념식 때마다 ‘북한의 도발’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직접 참석한 2번의 기념식에서 북한은 단 한 차례 언급됐다.

2020년 기념식에선 천안함 전사자 고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씨가 당시 분향을 하던 문 전 대통령에게 찾아가 “천안함은 누가 침몰시켰는지 알려달라”는 호소했다. 문 전 대통령은 “정부 공식 입장엔 변함이 없다”라고만 말할 뿐, 북한을 언급하진 않았다. 24일 윤 대통령의 초청으로 기념식에 참석한 윤청자씨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윤 대통령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이름을 불러주셨다. 가슴이 울컥했다”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희생자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셨다. 아들의 억울함이 조금이라도 풀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기 전 천안함46용사 묘역을 찾아 고 정종율 상사 아들 정주한 군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기 전 천안함46용사 묘역을 찾아 고 정종율 상사 아들 정주한 군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을 기억하고 예우하지 않는다면, 국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미래도 없습니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한 서해수호 용사분들께 경의를 표하며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며 “우리 국민과 함께 국가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낸 위대한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기념식 전엔 유가족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전사자들의 묘역을 참배했다. 윤 대통령은 장병들의 묘비 뒤편에 적힌 생년월일을 보면서 “전부 20살, 21살, 여기도 21살, 생일은 아직”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유가족들은 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한 윤 대통령에게 고마움도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의장대 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의장대 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실은 이번 행사를 준비하며 육·해·공·해병 의장대 사열 규모를 지난해 40여명에서 130여명으로 확대했다. 정부 및 군 관계자들과 뒤섞여 후열에 배석했던 유족과 참전 장병에겐 별도의 좌석이 앞자리에 마련됐다.

천안함 생존장병으로 기념식에 참석한 전준영씨는 이날 통화에서 “좌석 배치는 과거 윤 대통령을 만나 부탁했던 사안”이라며 “마침내 전사자와 유가족, 생존자가 기념식에 주인공이 됐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저 역시도 롤콜을 들을 때 울었다. 윤 대통령에게 고마웠다”고 덧붙였다. 기념식엔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주호영 원내대표, 박대출 정책위의장 등 여당 지도부도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기념식 뒤 각 군 참모총장들과 오찬을 하며 군을 격려했다.

한편 이날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21일~23일 성인 1001명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지난주보다 1%포인트 오른 34%를 기록했다. 2월 넷째 주 37%를 기록한 뒤 하락하다 한 달 만에 반등했다. 긍정평가 이유와 부정평가 이유 공히 한·일 관계와 외교가 각각 1·2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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