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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추산이 108만명이었다....시청사 불까지 지른 佛 연금시위 [영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2년 연장하는 내용의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프랑스 시민들의 시위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제9차 반대 시위에선 지방의 한 시청사와 경찰서가 불탔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인명 피해도 잇따랐다.

100만명 이상 시위, 시청에 방화도  

프랑스 정부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23일 툴루즈 도심에 모인 가운데,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지르는 등 시위가 격화되면서 경찰들이 최루탄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프랑스 정부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23일 툴루즈 도심에 모인 가운데,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지르는 등 시위가 격화되면서 경찰들이 최루탄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AP통신·BBC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250여개 지역에서 열린 9차 시위에선 정부 추산 108만9000명이 참여했다. 시위를 주최한 노동총연맹(CGT)은 350만명 이상이 집결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시위는 연금 개혁안의 하원 표결 처리를 앞둔 지난 1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의회 동의 없이 정부 입법을 가능케 하는 헌법 49조 3항을 앞세워 하원 표결을 건너뛴 이후 처음으로 8개 주요 노조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한 시위였다.

수도 파리에서는 시위대가 바스티유 광장을 출발해 레퓌블리크 광장을 거쳐 오페라 광장으로 행진했다. 전반적으로 평화로웠으나 일부 시위자들이 식당·슈퍼마켓·은행 등 창문을 망가뜨렸고, 돌을 던지거나 폭죽을 쏴 경찰과 충돌했다.

보르도에선 시청 정문에 화재가 발생했고, 로리앙에선 경찰서가 불 탔다. 낭트 등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 분위기가 과열되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루앙에서는 한 젊은 여성이 경찰의 플래시볼 수류탄에 맞아 엄지손가락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마르세유·리옹·브장송·렌·아를 등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23일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서 일부 시위자가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질러 소방관이 화재 진압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3일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서 일부 시위자가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질러 소방관이 화재 진압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부 장관은 이날 하루 프랑스 전역에서 과격 시위를 벌인 80명 이상을 체포했으며 시위 대응 과정에서 다친 경찰관은 최소 123명이라고 밝혔다.

이번 시위로 프랑스 관광업계에도 타격이 있었다. 에펠탑과 개선문, 베르사유 궁전 등 관광객이 많이 찾는 파리 명소들도 파업 여파로 문을 열지 않았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는 시위대가 터미널 입구를 막아 여행객들은 차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가야 했다. 오를리 공항에서는 항공편 30%가 취소됐다.

AFP통신은 마크롱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시위대를 설득하지 못하고 더욱 격앙시켰다고 보도했다. 앞서 지난 22일 마크롱 대통령은 TV 생방송에 출연해 “지지률 하락을 감수하고 연말까지 연금 개혁안을 시행하겠다”고 예고했다.

프랑스 여론조사업체 오독사에 따르면 대국민 담화 직후 이뤄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6%가 마크롱 대통령의 설득에 수긍하지 않는다고 했고, 83%는 앞으로 시위가 더 악화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노조는 오는 28일 제10차 시위를 개최하기로 의결했다.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얼굴을 악마로 표현한 사진이 등장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올 연말까지 연금 개혁안을 시행하겠다"고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얼굴을 악마로 표현한 사진이 등장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올 연말까지 연금 개혁안을 시행하겠다"고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佛 연금개혁 반발 유독 심한 이유는

출산율이 떨어져 노동인구가 줄고, 기대수명이 늘어 고령화가 심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이로 인해 연금 재정 압박이 커지면서 각국에서 연금 개혁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연금 수급자당 취업자 수는 2000년 2.1명에서 최근 1.7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정년이 빠른 프랑스가 다른 유럽 국가에 맞춰 정년을 늘리는 것에 국민의 반발이 유독 심하다고 영국 스카이뉴스는 보도했다. 프랑스의 현행 정년퇴직 연령은 62세로 유럽 주요국 중 가장 낮다. 벨기에가 65세, 독일·영국·스페인은 66세, 네덜란드·이탈리아는 67세다.

프랑스의 연금 개혁안은 현재 62세인 정년을 올해 9월 1일부터 매년 3개월씩 연장해 2027년에는 63세, 2030년까지는 64세로 늘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 가디언이 인용한 50대 초반의 한 프랑스 교사는 “오늘 64세로 늘리면, 내일은 66세, 67세, 68세가 될 것”이라면서 “쓰러져 화장터에 실려 갈 때까지 일해야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7월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 해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해 7월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 해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프랑스인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한다. 1980년 주 35시간제를 도입하면서 유럽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국가로 꼽힌다. 지난해 9월 프랑스 여론조사업체 IFOP가 실시한 조사에선 응답자의 61%가 소득이 줄더라도 자유 시간을 더 갖고 싶다고 답했다.

그만큼 빨리 은퇴해서 여유롭고 안락한 여생을 보내고 싶어한다. 그에 맞춰 연금제도가 갖춰지다 보니 연금소득이 많은 편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프랑스는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75%로 꽤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2%, 유럽연합(EU) 평균 64%보다 10%포인트 이상 높다. 퇴직자의 4.4%가 빈곤선 이하로 생활하고 있는데, 이는 OECD 38개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치다. 브루노 크레티앵 프랑스 사회보호연구소 소장은 “프랑스인들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연금제도와 같은 세계 최고의 사회 보호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크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롱 정부가 연금제도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고 나서자 노조 단체 등을 중심으로 한 일부 프랑스인들이 강경 반발로 맞선 것이다. 1995년 연금 개혁 시도는 3주 동안 계속된 역대 최대 규모 파업으로 좌초됐다. 2010년에는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늘렸지만, 거센 후폭풍 끝에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대통령이 2년 뒤 치른 대선에서 패배했다.

프랑스 언론인 아그네스 푸아리에는 스카이뉴스에 “연금 개혁이 프랑스에서 뜨거운 이슈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민 대부분 국가연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프랑스인은 매우 운이 좋은데, 얼마나 좋은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는 영국, 미국 등과 달리 개인연금 가입률이 높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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