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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통표' 여기선 지금도 쓴다...열차충돌 막는 '폐색'의 비밀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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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태백역~문곡역 사이 철길에서 관광열차와 여객열차가 정면 충돌해 1명이 숨졌다. 뉴스1

지난 2014년 태백역~문곡역 사이 철길에서 관광열차와 여객열차가 정면 충돌해 1명이 숨졌다. 뉴스1

 열차가 달리다 고장으로 갑자기 선로 위에 멈춰 서게 된다면 아마도 뒤따라 오는 기차가 가장 염려될 겁니다. 혹시나 뒷 열차가 고장 사실을 모르고 진행하다 추돌사고를 내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인데요.

 사실 이런 걱정은 1800년대 중반 열차가 처음 개통했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자료를 보면 당시에는 신호체계도 변변치 않은 탓에 '폴리스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다가 열차가 들어오면 기관사에게 손으로 진행 또는 정지신호를 보냈다고 하는데요.

 간혹 앞서가던 열차가 고장 나서 멈추는 경우엔 추돌사고를 막기 위해서 폴리스맨이 뒤에 오는 열차로 뛰어가서 온몸으로 정지신호를 보냈고 합니다. 사람이 사고를 막는 신호등 역할을 한 셈이죠.

 또 사람이 기차 앞에서 말을 달려 선로에 아무 지장이 없음을 확인한 후 기차가 따라서 올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열차 속도가 점차 빨라진 데다 육중한 체구 탓에 제동거리도 길어지면서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고 주행하는 방식으로는 철도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기관사가 사고 열차를 발견하고 급제동을 하더라도 정지까지 시간이 걸리는 탓에 추돌이나 충돌을 피하기 힘들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고안한 방식이 바로 '폐색(閉塞)' 입니다.

 영어로는 '블로킹(blocking)'이라고 부르는데요. 말 그대로 '닫고 막는다'는 의미로 열차가 다니는 선로의 일정구간을 나눠서 그 안에는 하나의 열차만 운행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입니다.

선로 변에 설치된 신호기. [사진 코레일]

선로 변에 설치된 신호기. [사진 코레일]

 이렇게 되면 만일의 경우에도 다른 열차가 해당 구간에 진입하는 걸 막아서 추돌이나 충돌사고를 막을 수 있는데요. 폐색방식이 도입된 초기에는 주로 역과 역 사이를 폐색구간으로 정해서 운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특정 역을 출발한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한 뒤에야 후속 열차를 보낼 수 있다 보니 열차 운행 간격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첨단신호시스템 등을 활용해서 폐색구간을 더 짧게 운영한다고 합니다.

 코레일에 따르면 폐색방식은 크게 '고정 폐색'과 '이동 폐색'으로 나눕니다. 고정 폐색은 지하철과 국철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역과 역 사이의 폐색구간을 최초 계획된 열차운행 간격에 맞춰 나누고, 이 구간에 신호기 등 관련 장비를 설치해서 열차 진입을 조정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전동차는 약 200m, 속도가 빠른 일반철도는 600~800m, 고속철도 구간에서는 1.2㎞ 간격으로 중간마다 폐색신호기를 설치해서 운영한다고 하는데요. 이들 신호기가 선행열차 상황에 따라서 구간 구간 들어오는 후속 열차에 정지 또는 서행 신호를 보내주는 겁니다.

고정 폐색 방식. 일정한 구간을 나눠서 정지와 서행을 한다. [자료 코레일]

고정 폐색 방식. 일정한 구간을 나눠서 정지와 서행을 한다. [자료 코레일]

 지하철이나 열차가 운행 중 선로 위에 멈춰선 뒤 “신호정지 관계로 잠시 정차하고 있습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나오는 것도 상당부분 폐색구간과 관련이 있다고 하네요.

 많은 선로에서 사용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유지보수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 기관사가 신호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습니다.

 물론 이처럼 기관사가 실수나 갑작스러운 신체적 이상으로 신호를 못 보거나 잘못 보고 신호기의 제한속도를 초과해서 통과하는 경우 자동으로 열차를 세우는 '열차자동정지장치(ATS, Automatic Train Stop)'라는 대비책이 있긴 합니다.

 반면 이동 폐색은 열차 상호 간의 위치와 속도를 무선 통신으로 파악해 달리면서 열차 운행 간격을 조정하는 첨단 방식인데요. 고정적인 폐색구간 대신 실시간으로 운행하는 열차들이 유지하는 안전간격이 사실상 폐색구간이 되는 겁니다.

이동 폐색 방식. 열차 간에 달리면서 무선통신으로 안전간격을 유지한다. [자료 코레일]

이동 폐색 방식. 열차 간에 달리면서 무선통신으로 안전간격을 유지한다. [자료 코레일]

 경부·호남고속철도와 서울지하철 5·6·7·8·9호선 등에서 가능하다고 하는데요. 코레일 신호제어처의 배태기 부장은 “이동 폐색을 하면 선행열차와 후속열차의 위치·속도에 따라서 열차 간격이 최소가 되도록 제어할 수 있다”며 “안전을 고려하면서도 운행 간격 단축이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현재 국내외에서 개발 중인 열차 자율주행시스템이 등장하게 되면 운행 간격이 더 촘촘해질 수 있을 거란 전망도 나옵니다. 자율주행차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AI)을 탑재한 열차들이 서로 실시간 소통하면서 스스로 간격을 안전하게 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경인선이 1899년 처음 개통했을 당시에는 폐색구간을 오갈 때 '통표'라는 걸 사용했습니다. 일종의 열차운행허가증인데요. 통표 폐색은 선로가 하나인 단선구간에서 주로 쓰였다고 합니다.

경인선에 사용됐던 통표의 모형. [사진 코레일]

경인선에 사용됐던 통표의 모형. [사진 코레일]

 특정 역에서 다음 역으로 갈 때 우선 양쪽 역의 운행관리자 간에 연락을 취해서 열차를 출발시켜도 되는지 협의가 끝나면 출발역에 설치된 통표 폐색기에서 1개의 통표가 나오는데요. 열차 기관사는 이 통표를 받아서 운행에 나서게 됩니다. 통표 없이 운행은 금지입니다.

 이 사이 반대편 역에서는 통표가 발급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열차는 정지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후 먼저 출발한 열차가 도착해서 통표를 반납하면 그제야 통표를 받아서 다음 역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경인선에선 1908년까지 네모난 통표를 사용했는데요. 일제 강점기부터는 원형 고리 형태의 통표로 바뀌었습니다. 통표 폐색은 현재 국내에선 단선구간인 점촌역(경북선)과 주평역(문경선) 사이에서 볼 수 있다고 하네요. 또 정선선에도 통표시스템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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