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혼돈의 국제질서, 북한의 대남·대미 핵 공갈 유혹도 증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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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장기전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교부 차관·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교부 차관·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

1년을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은 양측이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지만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러시아가 인접국을 전면 침공함으로써 유엔 헌장과 국제법, 우크라이나 안보를 보장한 1994년 부다페스트 선언을 위반하고 전후 유럽 평화를 크게 흔들었다.

전쟁의 향방은 서방의 지원 정도, 러시아의 내부 변화, 중국의 무기 지원 참여, 전쟁 양상 등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 여론은 지원이 지나치다는 의견이 1년 새 7%에서 26%로 늘었다. 민주당·공화당 간 이견도 커져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외교적 해결 압박이 거세어질 전망이다. 유럽도 조기 종전을 바라는 프랑스·독일과, 러시아 패배를 원하는 영국·폴란드·발트3국 간 온도 차가 있다.

석유·가스 성장판 닫힌 러시아의 쇠락 더 앞당겨질 수도
러시아 편들려는 중국, 국제사회 반발이란 딜레마 직면
“외교로 풀어야” 11월 미 대선 앞두고 압박 요구 커질듯
국력 커진 만큼 취약점 노출한 한국, 국익외교 집중해야

종전이냐 휴전이냐, 국가마다 온도 차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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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제재가 단기적으로 별 영향이 없고, 러시아의 전쟁 지지도 80% 정도로 높다. 코로나19 봉쇄 후유증을 겪었고, 유럽과의 관계를 배려해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미·중 경쟁이 크게 격화하지 않는 한 본격적 무기 지원을 삼갈 것이다. 올여름까지의 군사적 성과가 관건이다. 이란·이라크전 같은 장기 소모전이냐, 한국전쟁 같은 휴전이냐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사회를 크게 흔들었다. 그 향배는 포스트 탈냉전 시대 국제질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첫째, 이미 침체한 러시아의 쇠락을 앞당길 전망이다. 서방의 제재 강화, 유럽의 에너지 공급처 변경 및 녹색에너지 전환은 러시아 경제의 심장인 석유가스산업을 위축시키고 있다. 1000여 개에 달하는 서방 기업 철수, 젊은 엘리트의 국외 탈출, 인구 감소 가속이 겹쳐 러시아의 경제력 침하로 연결될 것이다. 막강 군사력이라는 신화가 붕괴하고, 유엔 총회에서 회원국 4분의 3이 침공 규탄 결의에 동참하며 외교 고립도 깊어졌다. ‘무제한의 우호 관계’라는 중·러 관계도 ‘제한 있는 비대칭 관계’(junior partner)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뇌사 상태’라 했던 나토의 활성화, 외교·안보가 따로 놀던 유럽의 안보 능력 증강, 대서양 양안 관계의 강화를 가져왔다. 중립국 스웨덴·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하게 되면 벨라루스를 제외한 북부 및 중부 유럽 모두 나토 회원국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핀란드가 단기간에 영국군의 2배인 28만 명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략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나토가 러시아 억지를 위한 준비 태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시대적 전환점(Zeitwende)’을 맞은 독일이 국방비를 1000억 유로(약 139조원) 특별 증액하는 것과 함께 국내총생산(GDP) 2%까지 늘리기로 했다. 중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유럽 안보 부담을 줄여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대중 전략경쟁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은 당 통제와 안보에 중점

셋째, 중국의 전략적 딜레마가 깊어졌다. 전략적 제휴 관계인 러시아를 돕고 싶겠지만, 대미 관계의 관리 부담, 유럽의 반발, 국제사회의 러시아 비난 여론 등을 고려할 때 지원 수위 조절이 어렵다. 러시아의 고전은 중국의 대만 통일을 위한 전략 계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진핑 3기 중국은 미국의 봉쇄·포위·압박을 비난하면서 대미 전략경쟁에 초점을 둔 ‘통제와 안보’에 방점을 두고 있다. 국내 통제를 위해 당의 개입을 늘리고,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 대비하기 위해 내수 확대, 기술 혁신, 에너지·식량 안보를 강조하고 있다.

넷째, 강대국 경쟁 시대를 맞이하여 동맹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의 억지가 실패해 발생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었으면 침략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동맹의 억지 효과를 증명한다. 다만 많은 제3그룹(Global South) 국가는 서방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인도·인도네시아·브라질·남아공 등 개도국 다수는 러시아 비난 결의나 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과거 미국의 이라크 침공, 우크라이나 난민에게만 우호적인 유럽 태도, 개도국에 대한 선진국의 인색한 기후변화 지원 등이 불만이다. 비동맹그룹 같은 단체행동은 아니지만, 다자 무대의 국제 여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섯째, 현대전 양상에도 큰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신기술을 활용하여 싸고 작고 분산된 무인 무기들과 병력·무기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인공지능으로 다양한 상황 분석을 빠르게 제공하여 적을 압도하는 모자이크 전쟁이 효과를 거두었다. 신기술의 군사적 유용성이 확인되면서 기술 우위를 점하려는 경제안보의 중요성이 증가할 것이다.

한편 러시아의 핵 사용 위협은 핵전쟁 위험을 높여 올해 지구종말시계를 10초 단축해 역대 가장 근접한 90초가 되었다. 핵무력정책법으로 선제 사용의 창을 활짝 열어젖힌 북한에 핵 공갈의 유혹을 더욱 높이는 결과도 가져왔다.

녹색에너지 전환 속도 붙을 수도

끝으로 에너지·식량 지정학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장기적으로 녹색에너지 전환을 5~10년 앞당기는 효과를 예상한다. 단기적으로는 석유·가스 시장의 수급 불안정으로 유럽 제조업의 경쟁력을 떨어트리고 부채 과다로 이미 곤경에 빠진 개도국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탄소·신재생에너지 자원 공급선의 중국·러시아·OPEC플러스 의존도 에너지 지정학을 복잡하게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식량과 비료의 주된 생산지라는 점도 식량 안보의 중요성을 높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초불확실성·초연결성·초변동성의 늪에 빠진 포스트 탈냉전 국제질서를 더욱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글로벌 중추 국가(GPS)를 추진하면서 높아진 국력만큼 취약성도 커진 점을 고려해야 한다. 칭기즈칸의 책사 야율초재는 “장점을 늘리는 것보다 단점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산재한 암초를 잘 살피면서 외교 방향타를 조정해야 한다.

신각수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교부 차관·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