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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피해자에서 생존자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외상 경험은 개인에게 강렬한 두려움, 심각한 혼란감을 주는 충격적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장기간 개인의 마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미국심리학회에서는 트라우마를 ‘세상을 정의롭고 안전하며 예측 가능한 곳으로 바라보는 개인의 관점에 도전하는’ 사건이라고도 말합니다. 자연재해나 범죄피해와 같은 트라우마는 개인의 일생을 뒤흔들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많은 임상심리학자는, 적어도 저는, 어떤 사건이 개인에게 트라우마일지 아닐지를 논할 때 매우 조심스러워집니다. 쉽게 트라우마라 단정 짓지 않도록 합니다.

학대 경험 정신건강 해치지만
피해자 인지능력엔 영향 미미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 있으면
꿋꿋하게 버텨내고 다시 설 것

마음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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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라는 단어에 유독 엄격한 많은 임상가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가정 폭력이나 집단 따돌림, 혹은 사이비 종교단체의 위압으로 자기 생의 어느 순간을 잃어버린 분들을 마주할 때입니다. 가장 믿을 만한 혹은 가장 사적인 관계에서 장기간 학대를 받은 분들입니다.

사적 관계에서의 학대 경험이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관계에서의 외상적 경험은 대개 짧게 끝나지 않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될 이들을 잘도 알아보며, 함께 가해자가 될 ‘동료’들도 쉽게 구합니다. 혼자 감당해야 하는 학대의 역사는 깁니다. 이 때문에 트라우마의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학습된 무력감’을 호소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듣는 사람이 없었기에 무력감은 더욱 커집니다.

둘째, 가해자 앞에서 이들은 자신의 고통과 절망감을 철저히 숨겨야 합니다. 가해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혹은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과 마음을 속입니다. 이 때문에 관계에서 경험한 트라우마는 자연재해나 심각한 교통사고와는 전혀 다른 마음의 지도를 만듭니다. 나조차도 내 감정을 알아보기 어려워집니다. 내가 지금 화를 내도 될까? 이제는 내가 기뻐해도 될까? 이 역시 트라우마가 하는 일입니다. 더욱이 사건에 비해 반응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는 2차 가해는 피해자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힙니다.

특히 아동·청소년기의 학대 경험은 뇌를 빠른 시간에 웃자라게 합니다. 9498명 아동·청소년의 데이터를 토대로 2019년 발표된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트라우마 경험으로 인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여물지 못한 뇌는 여러 정신건강 문제에 취약했습니다. 지난 2월 미 정신과학회지에 게재된 한 연구는 아동기 학대와 관련한 34개 연구, 5만5000여 명의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학대 경험은 분명 고립감, 죄책감, 불안, 우울, 수면 문제와 같은 정신건강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9498명 추적 연구에 따르면 비록 아동기 학대가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쳤을지라도 개인의 인지 능력에 끼치는 영향력은 미약했습니다. 반복적인 심각한 외상 경험에도 피해자의 기억 기능, 사회적 기능, 계획 능력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다시 꼿꼿이 자신의 속도로 자기 생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만5000여 명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아동기 학대 경험이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둘의 연관성은 약했습니다. ‘학대는 정신건강 문제와 작은 크기의 관련성을 보였다’는 저자의 건조한 글귀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위로를 주는 경구로 느껴져, 트라우마를 연구하는 제 연구실 대학원생들에게 즉시 공유했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개인의 정신건강에 더욱 중요한 요소는 트라우마 자체보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적 요인입니다.

트라우마 직후의 단단한 사회적 지지체계는 모든 이에게 강력한 정신건강 보호 요인이 됩니다. 가해자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요구하며 함께 분노하는 마음들, 피해자를 지키고 선 마음들은 트라우마 피해자의 회복을 돕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경험하는 것은 피해자의 뇌에 새로이 길을 틉니다. 폭력적인 관계에 들어선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부끄러워하고, 무력해야 하고, 슬피 울어야 하는 쪽은 가해자입니다.

이제 트라우마가 더 이상 피해자들을 규정하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때로는 다시 눈물을 흘리고 분노로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겠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은 피해자로 살아가지 않기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렇게 트라우마 피해자는 트라우마의 생존자가 됩니다. 이들은 그 모든 시간을 버텨낸 생존자로서 용감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자리에 설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을 존엄성을 두르고.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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