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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야 본회의 직회부→대통령 거부권…정치실종 악순환 시작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거야(巨野)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건너뛰고 본회의에 직회부(直回附)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23일 본회의 표결로 처리했다. 향후 간호법, 방송법 등도 야당의 직회부를 거쳐 본회의 통과가 유력하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양곡관리법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었다. 야당 강행-대통령 거부권의 정치 실종 상황이 장기화될 공산이 커졌다.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표결이 진행되고 있다. 이날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찬성 169표, 반대 90표, 기권 7표로 통과됐다. 김성룡 기자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표결이 진행되고 있다. 이날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찬성 169표, 반대 90표, 기권 7표로 통과됐다. 김성룡 기자

23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은 재석의원 266명 중 169명 찬성, 90명 반대, 7명 기권으로 가결됐다. 이날 민주당이 김진표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수용해 수정·제출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생산량이 3~5% 범위에서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기준 이상 초과 생산될 경우 ▶쌀 가격이 전년 대비 5~8% 범위에서 농림부령으로 정하는 기준 이상 하락할 경우 정부의 쌀 매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쌀 초과생산량이 3% 이상이거나 쌀값 하락률이 5% 이상일 경우 정부가 의무매입하도록 했던 민주당 원안보다 정부 재량권을 넓혔다.

그간 정부·여당은 “의무매입 강제는 시장기능을 저해하고 정부 재정부담을 가중시킨다”며 양곡법 개정안에 반대했다. 이에 민주당은 국회법 제86조 3항을 근거로 지난해 12월 28일 법사위(위원장 김도읍)에 계류 중이던 양곡관리법을 본회의에 직회부했다. 김성환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제안설명에서 “정부·여당은 ‘공산화법’ 운운하며 철 지난 색깔론으로 폄훼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대통령 거부권마저 거론한다. 농민은 안중에도 없는 후안무치한 태도”라고 날을 세웠다.

양곡관리법 통과로 ‘상임위 단독의결→본회의 직회부(법사위 패싱)→본회의 통과’가 169석 거야의 새로운 입법공식이 됐다. 이날 본회의에는 지난달 9일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민주당 주도로 직회부가 결정된 간호법·의료법 등 6개 법안도 부의됐다. 지난 21일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야당 단독으로 본회의 직회부를 의결한 방송법 개정안도 곧 본회의로 넘어온다. 민주당은 지난달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의결한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도 조만간 본회의에 직회부하겠다는 방침이다.

전해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지난달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당 의원들의 반발 속에 거수로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에 대한 의결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전해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지난달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당 의원들의 반발 속에 거수로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에 대한 의결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당초 직회부 조항은 2012년 국회선진화법 개정 당시 '법사위의 상왕(上王) 노릇을 제한한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법사위가 120일 이내에도 법안 심사를 마치지 않을 경우 상임위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국회의장에게 직회부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직회부가 활용된 건 2017년 12월 세무사법 개정안이 대표적이었다. 변호사가 세무사 자격을 자동으로 취득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의 법안을 1년 넘게 법사위가 방치하자, 기획재정위는 여야 합의로 해당 법안을 본회의에 직회부해 통과시켰다.

하지만 민주당이 2020년 21대 총선에서 180석에 가까운 의석수를 차지하면서 직회부 조항은 거야 입법독주의 무기가 됐다. 현재 야당이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고, 친민주당 성향 위원이 5분의 3 이상을 차지하는 국회 상임위는 예결위를 뺀 전체 상임위 17개 중 9개에 이른다. 특히 2021년 원 구성 협상 당시 민주당은 여당에 법사위원장직을 내주면서 직회부 요건인 법사위 계류 기간을 기존 120일에서 60일로 단축시켰다. 법사위 무력화를 위한 노림수였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23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를 마친 뒤 대표실로 이동하면서 야권의 양곡관리법 강행처리에 대해 "입법 폭력"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연합뉴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23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를 마친 뒤 대표실로 이동하면서 야권의 양곡관리법 강행처리에 대해 "입법 폭력"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은 이날 양곡법 통과를 맹비난하며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촉구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본회의장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자기들이 다수 여당일 때는 통과시키지 않았던 것을 지금 ‘아니면 말고’ 식으로 통과시키는 건 입법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민생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각계각층 우려를 무시한 ‘이재명 대표 하명법’”이라며 “대한민국 농업의 미래를 위해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1월 4일 농림부 신년 업무보고 자리에서 “무조건 정부가 매입해주는 양곡관리법은 농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핵심관계자도 지난달 27일 “한 정당이 여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한 법안에 대해서는 (거부권 행사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날 대통령실은 거부권에 대해 “각계의 우려를 포함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히 숙고할 예정”이라고만 했다.

정치권에선 향후 야당의 직회부에 여당이 대통령 거부권으로 맞서는 무한 대치 국면이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특히 여권 내에선 잇단 ‘법사위 패싱’을 막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여당과 야당이 서로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면서 협치가 사라진 게 사태의 본질”이라고 지적한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민주당은 입법독주를 하고 있고, 정부는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 협조를 위해 손을 내밀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며 “국민이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할 테니 여야 둘 다 전혀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도 “여야가 상대에게 데미지(damage·피해)를 입히기 위한 정치만 하고 있다”며 “제도적 자제와 상호 존중이라는 민주적 규범이 사라져 의회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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