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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넘어야” 대통령의 23분 국민 설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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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윤석열

윤석열

윤석열(얼굴)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정부의 대일(對日) 관계개선 노력을 향한 국민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고, 야권의 공세가 더욱 거세어지자 윤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에서 23분 동안 한·일 관계 관련 발언을 쏟아내며 직접 국민을 설득했다. 글자 수로는 7500여 자에 달했다. 형식은 국무회의 모두발언이었지만 실제로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대국민 담화였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국내 반발 여론을 직접 설득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며 “불리한 구도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이 발현됐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은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2차대전 때 한 말로 발언을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현재와 과거를 서로 경쟁시킨다면 반드시 미래를 놓치게 될 것이다.” 처칠은 의회 연설에서 이 말로 영국 내부 분란을 정리하고 독일과의 일전에만 집중했다. 윤 대통령은 “과거는 직시하고 기억해야 된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며 “한·일 관계도 이제 과거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지금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저는 현명한 우리 국민을 믿는다”고 천명했다. 최근 몇 년 새 굴곡진 한·일 관계의 주요 장면을 열거한 윤 대통령은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고 토로했다. 윤 대통령은 그러나 “손을 놓고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우리를 둘러싼 복합위기 속에서 한·일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임 문재인 정부를 콕 집어 “수렁에 빠진 한·일 관계를 그대로 방치했다”고 비판한 윤 대통령은 “저 역시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편한 길을 선택해 역대 최악의 한·일 관계를 방치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마저 적대적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을 자극해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한다면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고도 했다. 한·일 정상회담을 굴종 외교라고 비난하는 야당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윤 대통령이 언급한 ‘새로운 전환점’은 국내 정치의 이해득실에 따라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일로였다는 게 과거였다면, 이제는 협력의 파트너로서 국익에 기반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야 할 때란 의미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은 본인에 앞서 전환적 사고와 결단을 내린 박정희·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사례를 길게 언급했다. 박 전 대통령과 DJ는 각각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꼽힌다.

윤 대통령 “박정희·DJ도 결단했다” 보수·진보에 다 호소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모두발언을 통해 “한·일 관계를 방치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모두발언을 통해 “한·일 관계를 방치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뉴시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단 덕분에 삼성·현대·LG·포스코와 같은 기업들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는 일본 방문 연설에서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식민 지배 35년간이었다.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얘기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추가 사죄 발언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은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표한 바 있다”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이 한국 식민지배를 따로 특정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 표명을 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2010년 ‘간 나오토 담화’”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이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해 나간다면 분명 일본도 호응해 올 것”이라고 했다. 뒤이어 경제와 안보, 문화를 두루 언급하며 국익 관점에서 양국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한 윤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복원을 위해 필요한 법적 절차에 착수토록 오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지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정적 공급망 구축과 관련해 최근 발표한 경기도 용인의 세계 최대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에 일본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을 유치하는 방안도 소개했다. 한·일 관계 개선에 따른 효과로 ▶2050 탄소중립 이행 공동 대응 ▶글로벌 수주시장 공동 진출 ▶한국산 제품의 일본 시장 진출 확대 ▶일본인 관광 회복에 따른 내수 회복 및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언급했다.

안보 협력과 관련해선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 완전 정상화 선언으로 한·미·일 및 한·일 군사정보 협력을 강화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외교부는 이날 외교 경로를 통해 2019년 일본 측에 보낸 지소미아 관련 두 건의 공한을 모두 철회한다는 결정을 일본 측에 서면으로 통보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막연한 반일 정서에 눈치보지 않고, 상황이 어렵더라도 참모 뒤에 숨지 않는, ‘윤석열다움’의 모습으로 직접 대국민 호소에 나선 것”이라고 전했다.

제3자 변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부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해법에 대해서도 직접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1965년 국교 정상화 당시의 합의와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안”이라며 “피해자분들과 유족들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윤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 대해 “(윤 대통령이) 한·일 관계 파국의 책임을 전 정부, 나아가 대한민국으로 돌렸다”며 “윤 대통령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비판의 논평을 냈다. 안 대변인은 윤 대통령의 “배타적 민족주의” 언급과 관련해선 “배타적 민족주의는 파시즘이다. 국민과 야당을 파시스트로 매도한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방일 외교가 비판받는다고 국민과 야당을 파시스트로 매도하는 대통령이 어디 있냐”고 반문했다.

민주당 논평에 대해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대안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조공외교’ ‘내선일체’라며 극언을 쏟아내는 민주당은 도대체 과연 지난 5년간 무엇을 했단 말인가?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를 도운 ‘친북 외교’와 ‘혼밥 외교’ 말고 한 것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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