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태준의 마음 읽기

봄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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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봄의 계절이다. 연둣빛 세력이 왕성하다. 안도현 시인은 한 문장에서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라고 이 계절의 신선한 생명력을 노래했다.

고향 집에 계시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씨감자를 사러 시장에 가려던 참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식구들은 텃밭 일을 하시는 것조차 염려하지만, 땅을 놀릴 수 없으니 올해만 더 짓겠다며 또 텃밭 일을 시작하신다. 그래서 고향 집 집터에 딸린 작은 밭에는 어머니의 감자가 열리고, 고추가 붉게 익고, 부추와 대파가 푸르게 서고, 속이 찬 배추가 자랄 것이다. 이정록 시인이 시 ‘삽’에서 ‘농부는/ 삽을 뒤춤에 챙기고/ 물의 수평을 잡고/ 고랑과 이랑의 춤사위를 가늠한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어머니는 새봄에도 농부의 일을 위해 앙상한 두 팔을 걷어붙이신다.

씨감자 심는다는 어머니의 봄
봄은 연둣빛과 꽃의 대향연
소생 못 하는 것에 애상도 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어머니는 내일 동네에 부역이 있어서 나가보려고 한다고도 하셨다. 봄맞이 청소를 하는데, 어머니는 새참으로 내놓을 국수를 삶는 일을 돕겠다고 하셨다. 내 고향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손을 모아서 하는 공동 부역이 가끔 있다. 마을에 논의할 일이 있을 때는 회의를 열어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일일이 묻기도 한다. 물론 전원생활을 배경으로 한 연속극에서 보았던 그 확성기도 있어서 이장님의 육성으로 하는 안내 방송을 들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내 어렸을 적에는 이장님 댁에 유선전화가 한 대 있어서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그것을 알리려고 확성기 안내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밭일을 하다가도 그 방송을 듣고 전화를 받으러 가던 일이 있었다. 이제는 꽤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튼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근황을 통해 고향 마을의 봄 풍경을 눈에 선하게 그릴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는 수령이 많은 왕벚꽃나무들이 있다. 벌써 꽃망울이 맺혀 내일모레면 피기 시작할 것 같다. 마을에서는 이번 주말에 왕벚꽃축제를 연다고 한다. 비록 나는 이주해 온 사람이지만, 마을에서 하는 일들에 점차 손을 보태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장전리 마을에도 확성기 안내 방송 소리가 내 집 앞마당까지 들려오곤 한다. 요즘은 휴대전화나 여럿이 정보를 나누는 메신저 채팅방을 많이 이용해서 마을 공동체에서 하는 확성기 방송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이러한 알림의 방식이 더 정감이 있기도 하다.

봄은 돌아와 꽃은 여기저기서 핀다. 꽃이 진 그 자리에 다시 움이 트고 꽃은 핀다. 물기를 꼭 쥐어짜 놓은 것 같은 마른 꽃과 줄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새로운 싹이 올라온다. 그 싹도 머잖아 꽃봉오리를 지닐 것이다. 생명 세계의 순환을 다시 느끼게 된다. 나는 이러한 감흥을 졸시 ‘꽃과 식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게 꽃은 생몰연도가 없네/ 옛 봄에서 새봄으로 이어질 뿐// 꽃아/ 너와 살자// 우리의 가난이 마주 앉은 이 저녁의 낡은 식탁 위/ 꽃은 신(神)의 영원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네.’

봄이 되어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듯이 우리가 비록 지금 가난하고 어려운 때를 살더라도 우리의 삶에도 꽃의 시절이 곧 도래할 것임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봄의 세계가 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봄의 연둣빛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활착(活着)하는 것은 아닐 테다. 봄의 낮과 밤에 애상(哀傷)이 눈뜨기도 한다. 최근에 나는 서안나 시인의 ‘애월 1’이라는 시를 읽고 감정이 북받치어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넓은 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와/ 늙은 딸이/ 찬밥에 물을 말아/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정원 잔디밭에/ 잡풀이 귀신처럼/ 달려와 자라고// 어머니는/ 오래된 집처럼/ 천천히/ 눈과 귀가 멀어간다// 어디선가/ 야생 곰취 냄새가 난다/ 안방 낡은/ 화장대 위에// 폐가 아픈/ 나무 원앙// 피가 돌아/ 교교교교 운다.’

서안나 시인은 “시는 익숙한 세계에 낯선 목소리의 진동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시는 봄날의 다른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늙은 어머니와 딸이 사는 집은 크고 크지만 적막 또한 크다. 아버지의 부재는 이 집을 더 텅 빈 듯이 만든다. 시인은 입맛이 돌지 않아 물에 찬밥을 말아먹고, 정원의 잔디밭을 가만히 바라본다. 풀이 올라오고 있다. 정원의 잔디밭에도 봄이 온 것이다. 그러나 고운 봄빛이라고 하더라도 무너지고 쇠하고 잃은 것을 다 채워주지는 못한다.

오래된 의자 하나를 봄 햇살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두었다. 더러는 이곳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화단의 꽃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더 그리운 것들도 생각날 것이다. 그리하여 봄밤이 한없이 아득하고 깊고 깊다는 것을 또 느끼게 될 것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