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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국민 반발에도 연금개혁법 통과, 마크롱의 뚝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지난 20일 프랑스 하원에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 표결 중 ‘국민투표(RIP)’ 등이 쓰인 종이를 들고 정부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좌파 의원들. 이들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 49조 3항을 이용해 하원 표결을 거치지 않고 연금개혁안을 입법화한 데 대해 항의했다. [AP=연합뉴스]

지난 20일 프랑스 하원에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 표결 중 ‘국민투표(RIP)’ 등이 쓰인 종이를 들고 정부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좌파 의원들. 이들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 49조 3항을 이용해 하원 표결을 거치지 않고 연금개혁안을 입법화한 데 대해 항의했다. [AP=연합뉴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내용을 담은 프랑스 정부의 연금개혁안이 20일(현지시간) 의회 문턱을 넘었다. 하원에서 이날 진행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 표결이 부결되면서다. 국민 반발에도 연금개혁법을 밀어붙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승부수가 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야당 반발과 반대 여론이 가라앉지 않으면서 험난한 정국 운영이 예상된다.

프랑스24 등에 따르면 하원이 이날 표결에 부친 총리 불신임안에 278명이 찬성해 총 577석 가운데 공석(4석)을 제외한 과반(287석)에 미치지 못했다. 9표 차 부결이다. 이 불신임안은 야당인 좌파 연합 뉘프와 자유·무소속·해외영토가 함께 발의했다. 여당 르네상스당(250석)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여소야대 상황이라 산술적으로 모든 야권이 단합하면 불신임안 통과가 가능했다. 그러나 연금개혁안에 우호적인 야권 내 중도 우파 공화당이 대오에서 이탈했다. 이들은 내각 총사퇴 등 불신임안 가결 후 벌어질 정국 혼란을 우려했다.

의회 입법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연금개혁안은 헌법재판소 격인 헌법위원회 심의와 대통령 서명을 앞두게 됐다.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법령이 의회 표결을 거친 후 대통령의 서명으로 공포되기 전 법령의 합헌성을 심사한다. 보른 총리는 성명을 통해 연금개혁안의 합법성에 대한 일부 야당 의원들의 비판을 언급하며 “(헌법위원회에서) 의회 논의 과정에서 제기된 모든 사항을 검토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마크롱 대통령이 정치 생명을 걸고 연금개혁에 나선 건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현재 상태로는 연금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프랑스 연금자문위원회(COR)에 따르면 프랑스 연금 재정은 올해 18억 유로(약 2조5000억원) 적자로 돌아서고, 2030년 135억 유로(약 19조원) 적자, 2050년 439억 유로(약 61조원) 적자가 예상된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9년에도 연금개혁을 추진했다가 노조 반발과 코로나19 사태로 접어야 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개혁에 성공한다면 역대 정권에서 30여 년간 추진했지만 성사시키지 못한 과업을 달성하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내각 불신임안이 가까스로 부결된 만큼 향후 의회 분열에 따른 정국 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야당은 헌법위원회에 연금개혁안 위헌 제소를 검토하는 한편, 보른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CNN은 “마크롱 대통령과 보른 총리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는 건 그들이 직면한 정당성 위기를 더욱 악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폴리티코는 불신임 투표 불참을 당론으로 정했던 공화당에서도 대거 이탈표가 나온 것에 주목하며 “당초 예상보다 근소한 차이는 프랑스의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킨다”고 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21일 보른 총리와 르네상스당 대표 등을 만나 현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국면 전환을 위해 보른 총리 교체 카드를 사용할 것이란 관측도 나왔지만, 올리버 베란 정부 대변인은 RTL 라디오 인터뷰에서 “총리는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라며 보른 총리에게 힘을 실어줬다.

불신임안 부결 소식이 전해지자 수도 파리에선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며 폭력 사태가 이어졌다. 일부 시민은 거리의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날 전국에서만 시위대 300명 이상이 경찰에 연행됐다. 교통·에너지·환경 등 프랑스 주요 노동조합은 23일 9차 대규모 총파업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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