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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는 가망 없다" 주력 산업도 시름 깊어진다

중앙일보

입력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에 수출입 화물을 실은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다. 연합뉴스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에 수출입 화물을 실은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다. 연합뉴스

“재고가 예상보다 너무 많습니다. 다들 버티고 있지만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경기도의 한 중소 전자업체 대표는 21일 중앙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경기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회사는 반도체와 전자기기의 인쇄회로기판(PCB) 공정에 필요한 부품을 공급한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한국 산업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반도체·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에서 ‘노란불’이 들어오고 있다. 주로 협력 업체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체 쪽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반도체와 석유화학 두 업종만 합쳐도 국내 수출액 비중에서 30%를 차지한다.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 연합뉴스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 연합뉴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1분기 실적 전망치는 먹구름 그 자체다. 반도체 업황 악화로 제조업 재고율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2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삼성은 “감산은 없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중소 소부장 업체들이 느끼는 체감 수위는 이보다 훨씬 깊다. 또 다른 반도체 협력업체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작은 기업들은 고물가·고금리·고환율에 특히 취약하다”면서 “상반기에는 가망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특히 현장에서는 “재고가 예상보다 훨씬 위험한 수준”이라는 경고 메시지가 잇달아 나온다. 황민성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도 인위적인 감산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일 것으로 판단된다”고 진단했다.

최근 안정세를 되찾은 국제 유가에도 불구하고 석유화학 업계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수익성은 비교적 나아졌지만 경기 둔화와 미국·유럽발 금융 불안 사태가 겹치면서 수요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어서다. 국내 주요 석유화학 업체 상당수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적자 행진이 이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결국 경기가 아직 살아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중국의 리오프닝에 기대감을 걸었지만 올 상반기까지는 계속 어려울 것이라는 게 내부적인 결론”이라고 말했다.

전남 여수시 여수국가산업단지에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다. 연합뉴스

전남 여수시 여수국가산업단지에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호황을 누렸던 해운 업계도 침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해상운송 항로의 운임 수준을 나타내는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최근 물동량 감소로 2년8개월 만에 1000선 아래로 떨어졌다. 정점을 찍었던 지난해 1월과 비교하면 5분의 1 수에도 못 미친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바클리스는 자체 집계한 화물 운임지수를 근거로 “해운 운임이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어 “앞으로 2년간 (해운업의) 수익성이 상당히 조정될 것”이라며 “해운 업계에 ‘대침체’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1위를 노리고 있는 K배터리도 암초를 만났다. 당장 유럽연합(EU)이 최근 발표한 ‘유럽판 인플레이션감축법’으로 불리는 핵심원자재법(CRMA)을 둘러싼 셈법이 복잡해졌다. 업계에서는 대체로 “이미 예상한 수준”이라면서도 현재 상당한 수준의 중국산 원자재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핵심 원자재의 다변화와 폐배터리 재활용 전략 등이 향후 과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신항에 접안한 한 선박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뉴스1

울산신항에 접안한 한 선박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뉴스1

전문가들은 대외 환경이 개선되지 않으면 위기가 확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형렬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물가(생산비용)는 떨어지지 않는데 경기 침체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주력 산업인 제조업은 그 특성상 도망칠 곳이 없다”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작은 외부 충격으로도 연쇄 도산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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