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2년 연장 등의 내용을 담은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안이 20일(현지시간) 의회 문턱을 넘었다. 하원에서 이날 진행한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 표결이 부결되면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개혁안 철회와 내각 해체 위기를 벗어나며 한숨 돌렸지만, 야당의 반발과 반대 여론이 가라앉지 않으면서 후폭풍이 이어질 전망이다.
단 9표 차 부결…연금 개혁안, 합헌성 심사대로
프랑스24 등에 따르면 하원이 이날 오후 표결에 부친 총리 불신임안에 278명이 찬성해 총 577석 가운데 공석(4석)을 제외한 과반(287석)에 미치지 못했다. 단 9표 차 부결이다. 이 불신임안은 야당인 좌파 연합 뉘프와 자유·무소속·해외영토가 함께 발의했다. 여당 르네상스당(250석)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여소야대 상황이라 산술적으로 모든 야권이 단합하면 불신임안 통과가 가능했다.
그러나 연금 개혁안에 우호적인 야권 내 중도 우파 공화당이 대오에서 이탈했다. 이들은 내각 총사퇴 등 불신임안 가결 후 벌어질 정국 혼란을 우려했다.
극우 국민연합이 별도로 발의한 총리 불신임안은 하원에서 찬성 94표를 얻는 데 그쳤다. 여당인 르네상스 소속 야엘 브라운-피베 하원의장은 표결 직후 "불신임안 두 건 모두 부결됐으므로, 이는 의회가 연금 개혁안을 채택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사실상 의회 입법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연금 개혁안은 이제 헌법재판소 격인 헌법위원회 심의와 대통령 서명을 앞두게 됐다.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법령이 의회 표결을 거친 후, 대통령의 서명으로 공포되기 전 법령의 합헌성을 심사한다. 보른 총리는 성명을 통해 연금 개혁안의 합법성에 대한 일부 야당 의원들의 비판을 언급하며 "(헌법위원회에서) 의회 논의 과정에서 제기된 모든 사항을 검토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야당, 위헌소송 예고에 총리 사퇴 요구까지
하지만 불신임안이 가까스로 부결된 만큼 향후 의회 분열 양상에 따른 정국 혼란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다. 야당은 헌법위원회에 연금 개혁안 위헌 제소를 검토하는 한편, 보른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뉘프의 핵심인 극좌 성향의 '굴복하지않는프랑스'의 마틸드 파노 하원 대표는 "정부와 개혁안을 무너뜨릴 단 9표가 부족했다. 프랑스인이 보기에 이 정부는 이미 죽었다"면서 "더는 합법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CNN은 "마크롱 대통령과 보른 총리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는 건 그들이 직면한 정당성 위기를 더욱 악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폴리티코는 불신임 투표 불참을 당론으로 정했던 공화당에서도 대거 이탈표가 나온 것에 주목하며 "당초 예상보다 근소한 차이는 프랑스의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킨다"고 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21일 보른 총리와 르네상스당 대표 등을 만나 현 상황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로이터통신은 마크롱 대통령이 22일 그간의 침묵을 깨고 방송 인터뷰를 통해 국민들에게 연금 개혁에 대한 계획을 설명할 것이라고 전했다. 올리버 베란 정부 대변인은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 지 설명할 것이고, 그의 입에 모든 시선이 쏠렸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마크롱 대통령이 국면 전환을 위해 보른 총리 교체 카드를 사용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지만, 이날 베란 대변인은 RTL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보른 총리는 자신의 거취를 의회의 손에 맡겼고, 그런 의미에서 (불신임안 부결은) 총리가 의회로부터 인정을 받은 셈"이라며 "총리는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라고 보른 총리에 힘을 실어줬다.
보른 총리는 "프랑스에 필수적인 연금 개혁을 위해 필요한 민주적 절차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면서 "나와 정부는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로 이 책임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대 여론도 거세
반대 여론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불신임안 부결 소식이 전해지자 수도 파리에선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며 폭력 사태가 이어졌다. 일부 시민들은 거리의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날 프랑스 경찰은 전국적으로 시위대 200명 이상을 연행했다. 교통·에너지·환경 등 프랑스 주요 노동조합은 오는 23일 9차 대규모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현행 62세인 프랑스인의 정년을 오는 9월 1일부터 매년 3개월씩 단계적으로 연장해 2027년엔 63세, 2030년까지는 64세로 늘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금을 삭감하지 않고 100% 받을 수 있는 사회보장 기여 기간도 42년에서 43년으로 1년 연장하는 시기도 2035년에서 2027년으로 앞당긴다. 대신 최소 연금 수령액을 최저임금의 75% 선(월 1015유로·약 142만원)에서 85%인 월 1200유로(약 168만원)로 올릴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