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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 하나요" 이 말도 어렵다…무조건 "괜찮다"는 자립청년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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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아 멘토와 자립준비청년들이 함께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 이씨는 홀트아동복지회가 주관하는 '파랑새 꿈날' 멘토링에 참여 중이다. 이성아 멘토 제공

이성아 멘토와 자립준비청년들이 함께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 이씨는 홀트아동복지회가 주관하는 '파랑새 꿈날' 멘토링에 참여 중이다. 이성아 멘토 제공

"괜찮아요."

보육원서 자립이 고립으로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6년째 자립준비청년(자립청년)의 멘토로 활동하는 이성아(40)씨가 청년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의례적인 대답"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거나 도전해서 성취해본 경험이 부족한 탓에 포기와 체념을 습관처럼 지닌 채 보육원을 졸업하는 친구들이 많다"며 "고깃집에서 밥을 먹을 때 '콜라 하나 시켜주세요' 같은 단순한 의사표시를 하는데도 몇 개월씩 걸리기도 한다"고 전했다.

보육원 출신 청년들은 기자에게 “문제를 제기해도 바뀌지 않으니 단념하게 된다" "자꾸 포기하게 되니 무력감에 빠진다"고 털어놨다. 보육원에서 자란 엄지은(가명‧28)씨는 며 "보육 시설에서 살 때 언니들한테 맞은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 얘기해도 시정되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며 지내는 게 몸에 배게 됐다"고 했다.

자립청년에 대한 지원이 금전적 보조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경제적 지원은 확대를 거듭해 왔다. 보육원 졸업 때 지급되는 정착금은 올해부터 800만에서 1000만원으로 늘었고, 5년간 지급되는 자립수당도 월 35만에서 40만원으로 인상됐다. 17년 동안 보육원 생활을 했던 김성민(38)씨는 "미래의 행복을 좇는데 경제적 지원은 큰 힘"이라며 "하지만 돈으로 풀 수 없는 심리적 고통과 불안이 자립청년들을 극단으로 모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상처→무력감→생활고 악순환

보호대상아동을 거쳐 보육원 졸업했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의지가 부족한 자립청년들이 적지 않다. 수도권의 정모씨 보육원 직원은 “진로에 관심이 없어 선생님이 정해주고, 지원금을 받기 위한 자기소개서는 몇 번을 닦달해도 써오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며 안타까워했다.

수도권의 한 보육원 모습. 해당 보육원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는 여기가 집이다″고 입을 모았다. 양수민 기자

수도권의 한 보육원 모습. 해당 보육원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는 여기가 집이다″고 입을 모았다. 양수민 기자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마음의 상처가 첫번째 원인이다. 보육원 출신의 한 청년은 “보호대상아동 시절부터 ‘부모에게서 버려졌다’라는 버림받음의 상처와 충격이 워낙 큰 탓에 자립청년이 돼서도 좀처럼 회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자립청년 허진이(28)씨는 “보호아동과 자립청년들이 자포자기하는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사회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며 “마음을 돌보는 정서 치료가 한 방법”이라고 했다.

부모로부터 학대받은 경험이 자립 동기를 위축하는 두 번째 원인이다. 보육원에 입소하는 어린이 중 학대 피해 비율이 높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부모 학대로 보호조치아동이 되는 비율은 매년 증가해 2021년 전체의 48.3%를 차지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튼튼한 마음은 자립과 동시에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보호대상아동일 때부터 치유를 시작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보육원 졸업 전 심리 치료 필요" 

최근 보육원들은 심리 치료에 힘쓰고 있다. 수도권의 한 보육원은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며 아이들이 피아노·바이올린·비올라 등 1인 1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한다. 가정 폭력 피해를 경험한 윤정민(가명·14)군은 “비올라 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아 예쁘다”며 “불안할 때 손톱을 뜯는 습관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라졌다”고 말했다. 7년째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유지은(가명‧14)양은 “힘든 때 바이올린을 켜면 슬픈 마음이 풀어진다”고 전했다.

수도권 한 보육원에서 아이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피아노를 치고 있다. 음악 치료의 일환이다. 해당 보육원 제공

수도권 한 보육원에서 아이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피아노를 치고 있다. 음악 치료의 일환이다. 해당 보육원 제공

보호대상아동과 자립청년의 실질적 자립을 위해선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보육원에서 생활지도원으로 일하는 김모씨는 “진정한 경제적 정신적 홀로서기는 주변 사람들과의 교감과 관심에 달렸다”라며 “마지막으로 연락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삶을 버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수도권 한 보육원의 김모 원장은 “보육원이 양육을 넘어 치료와 회복의 역할까지 해야 할 때”라며 “아이들의 심리 치료에 국가가 조금 더 신경을 써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수도권 한 보육원에서 선생님과 아이가 놀이 치료를 하는 모습. 해당 보육원 제공

수도권 한 보육원에서 선생님과 아이가 놀이 치료를 하는 모습. 해당 보육원 제공

자립준비청년 강환국(24)씨는 보육원 출신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스스로 ‘나는 살아있는데, 그 친구는 왜 죽었을까’라고 묻는다. 그의 결론은 결국 사람이다. 강씨는 “저는 시설 때부터 믿고 의지하는 대모님이 있다. 벌써 13년째다. 그런 의지할 분이 있으면 힘들어도 끝까지 버틸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김형모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자립청년들을 담당하는 직원의 수가 많아져야 청년과 유대감을 가질 수 있고, 내실 있는 관리가 가능해진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현실은 동떨어져 있다. 부산시 보호아동자립센터의 한 관계자는 “자립청년 한 명에게 보통 1년에 한 번 전화하는 실정인데 개인적 친밀감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수도권 한 보육원의 자립지원전담요원 정모 선생님이 아이들이 사용하는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다. 양수민 기자

수도권 한 보육원의 자립지원전담요원 정모 선생님이 아이들이 사용하는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다. 양수민 기자

보육원 단계에서 아동들을 돌보는 선생님은 줄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생님 1명이 반항기 나이대의 보호대상아동들 10명 이상 챙겨야 하는 현실이다. 수도권 K보육원의 이천규 국장은 선생님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아이들은 자신을 돌봐주는 선생님이 바뀌는 것에 큰 불안을 느낀다. 그런데 처우가 열악하니 떠나는 선생님이 늘고 자주 바뀐다. 아이들이 자립하고 집(시설)에 찾아와 후배 아동에게 조언하는 문화를 만들려면 나를 기억하는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한다. 선생님이 오래 머물러야 아이들도 집을 다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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