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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겨울의 행복한 북카페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겨울 작가·북 유튜버

김겨울 작가·북 유튜버

학창시절,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주어진 삶에 복무하기를 멈추고 예술적 영혼을 따라가는 삶! 스트릭랜드의 삶에 감정이입을 하며 진정한 열망을 찾는 일의 성스러움을 찬양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에의 추구가 유독 한 성에게만 자유로 주어져 왔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성, 즉 내가 속한 여성에게는 그러한 추구에 뒤따라오는 뒤치다꺼리가 삶의 과제로 주어져 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생님 한 분은 습관처럼 말했다. “너넨 그저 좋은 데 시집가는 게 최고지.” 나는 내가 스트릭랜드인 줄 알았으나 실은 그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영화감독 셀린 시아마의 말처럼,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를 사랑해왔다.” 사랑하지 않기만 하면 다행인가. 많은 예술 작품은 인간 보편의 감정을 다룬다면서 남자에게만 자유와 열정과 고뇌를 허락했고, 동시에 여성을 그러한 삶을 뒷받침해야 하는 존재, 혹은 그와 같은 삶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전락시켰다. 독자로서 남자 주인공의 보편적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으니 작가가 원한다면야 그렇게 쓸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도 있는 설정’은 책을 읽어도 읽어도 자꾸만 반복해서 등장했다.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2023)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 ‘그럴 수도 있는 설정’이 실은 얼마나 안이한 선택이었는지 밝힌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부터 『달과 6펜스』 , 『위대한 개츠비』,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역사적 걸작들은 여성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어왔던가. 이 걸작들을 폐기하거나 퇴출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이제는 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감의 관점을 움직여보는 것은, 타인의 시점을 통해 마음을 확장해보는 일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문학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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