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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준호의 사이언스&

1억도 300초 견디는 타일, 영하 270도서 가동하는 진공장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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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논설위원

천장형 크레인이 달린 3층 높이 공장 한쪽, ‘TCD 작업장’이라 써 놓은 팻말 아래 한 작업자가 은회색 기계장비를 조립하고 있다. 가로 3㎝, 세로 2㎝의 금속 타일 300개를 구리관에 끼워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 장비의 이름은 ‘텅스텐 카세트 디버터(Tungsten Cassette Divertor)’. 이달 말 타일 교체 정비에 들어가는 한국형 핵융합연구로(KSTAR)의 핵심 장비인 토카막 내벽에 들어갈 부품이다. 핵융합을 일으키는 섭씨 1억도의 플라즈마 열기를 가장 가까이서 막아내는 역할을 한다.

길이 1m가 채 안 되는 디버터 하나의 무게만 150㎏. 비중이 19.25로, 금속 중 가장 무겁고, 녹는 점이 3422도에 달하는 텅스텐이 주성분이다. 기존 KSTAR 토카막 내벽 타일로 쓴 탄소강으론, 최종 목표인 ‘1억도 300초’를 견딜 수 없다. 국가핵융합에너지연구원은 오는 8월까지 KSTAR 토카막 내벽을 텅스텐으로 교체해 연말까지 50초, 2026년까지 300초 기록을 세우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1억도 플라즈마 300초 유지’는 핵융합발전의 선결 조건이다. 300초 동안 1억도의 초고온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핵융합로를 24시간 가동하는 데 문제가 없다.

반월공단 비츠로넥스텍 르포

핵융합발전 등 최첨단장비 생산
60여년 전 ‘두꺼비집’으로 시작
중이온가속기 필수설비도 제작
“극한기술 역량이 국가 경쟁력”

누리호에 들어갈 우주로켓 연소기

경기도 안산시 비츠로넥스텍의 연구진이 한국형 핵융합연구로(KSTAR)의 핵심 장비인 토카막 내벽에 들어갈 텅스텐 카세트 디버터를 조립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경기도 안산시 비츠로넥스텍의 연구진이 한국형 핵융합연구로(KSTAR)의 핵심 장비인 토카막 내벽에 들어갈 텅스텐 카세트 디버터를 조립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TCB 작업장 옆 ‘가속기 작업장’엔 높이 4m에 달하는 원통형 장비가 놓여 있다.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에 들어갈 ‘크라이오 모듈’(Cryomodule)이란 이름의 극저온 유지를 위한 진공장비다. 영하 270도에서 가동되는 중이온가속기 초전도가속관을 위한 필수 장치다. 크라이오모듈 옆엔 모듈 안에 들어갈 구릿빛의 가속관이 한창 작업 중이다.

라온은 중이온을 빛 속도의 절반 수준으로 가속하는 최첨단 장비다. 가속한 중입자를 표적에 충돌시켜 물질의 근원을 연구하고,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자연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동위원소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연구소는 지난해 연말 중이온을 광속의 10분의 1 수준으로 가속하는 저에너지 구간을 완성했다. 공장 내 가속기 작업장의 크라이오 모듈은 ‘2029년 광속의 절반’ 수준을 목표로 하는 고에너지구간에 들어갈 시제품이다.

공장 반대쪽 구석엔 한국형발사체 누리호에 장착될 75t 액체 우주로켓 연소기가 놓여 있다. 2025년 예정인 4차 발사를 위한 부품으로, 로켓이 점화될 때 최고 3000도까지 오르는 온도를 견디면서 누리호를 우주로 밀어 올릴 추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완성된 연소기는 누리호 고도화사업 체계종합과 액체로켓 엔진 조립을 맡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 공장으로 보내진다.

한 공장 안에서 최첨단 거대과학기술 장비를, 한 종류도 아닌 여러 가지를 동시에 만들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자리한 중소기업 ‘비츠로넥스텍’이다. 서구 선진국 어디 첨단 대기업 공장 정도로 추측하기 쉽지만, 임직원 230명에 연 매출 470억원(2021년)의 중소기업이다. 국내 전통 공단에 입주한 이 작은 기업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출연연이 주관하는 여러 거대 공공 과학기술 프로젝트의 미래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직원 230명의 ‘강한’ 중소기업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의 고에너지 구간에 들어갈 진공 장비 크라이오 모듈을 검사하는 이 회사 직원들의 모습. 김경록 기자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의 고에너지 구간에 들어갈 진공 장비 크라이오 모듈을 검사하는 이 회사 직원들의 모습. 김경록 기자

비츠로넥스텍은 2016년 출범한 첨단 미래기술 기업이지만, 시작은 ‘두꺼비집’으로 불리는 단순한 전기 개폐기를 만들던 가내 수공업이었다. 1955년 ‘광명전기’ 이름으로 시작한 전력기기 전문 중견기업 비츠로테크가 모기업이다. 그간 축적해온 이종재료 접합기술 등의 기술로 1990년대 포항가속기연구소의 가속기 구축에 참여한 게 비츠로넥스텍의 사실상 출발이었다.

이후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2000년 사내 특수사업부 형태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항공우주연구원이 개발한 한국의 공식 첫 액체추진 과학로켓 KSR-3 프로젝트에 현대우주항공의 부품 공급사로 참여하면서 관련 사업을 키워왔다. 이후 경주 양성자가속기 가속장치와 포항 차세대방사광가속기 건설과 한국형 핵융합연구로 KSTAR에 참여했고, 2016년엔 물적 분할로 지금의 비츠로넥스텍으로 분사했다.

황리호 비츠로넥스텍 전무는 “국내 거대 과학기술 프로젝트 참여를 통해 쌓아온 기술을 바탕으로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사업에도 참여해 최근까지 800억원이 넘는 관련 부품을 수주했다”며 “현재도 전체 매출의 20% 이상을 수출로 올리고 있지만 향후 수출 비중이 더욱 올라갈 전망”이라고 말했다.

홍승우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은 “비츠로넥스텍은 중소기업이지만 자체적으로 장치 설계도 하고 연구 시설 및 인력을 갖춘 기업”이라며 “방사광가속기와 양성자가속기뿐 아니라, 정부 출연연구소들이 주관하는 여러 거대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관련 노하우가 쌓인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비츠로넥스텍과 같은 기업이 속한 분야를 ‘연구장비산업’이라고 한다. 연구장비산업은 기초연구부터 원천기술 개발, 산업 발전으로 이어지는 연구개발 가치사슬의 첫 출발이다. 이창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연구장비산업은 국가 과학기술경쟁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면서 미래 첨단산업의 기반이 되는 핵심 기술 분야”라며“ 극한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국내 제조기업의 역량이 국가 거대과학 프로젝트의 성공적 추진에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