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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프랑스 드러났다" 상처뿐인 마크롱 연금개혁 오늘 결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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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정년 2년 연장'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프랑스 시민들이 19일 수도 파리에서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프랑스 하원은 20일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표결한다. AP=연합뉴스

'정년 2년 연장'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프랑스 시민들이 19일 수도 파리에서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프랑스 하원은 20일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표결한다. AP=연합뉴스

지난 70일간 프랑스 정계와 사회를 격랑 속에 밀어넣은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혁안이 정년 2년 연장 등 핵심 내용을 유지해 발효될 전망이다. 20일(현지시간) 오후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의회에서 부결될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지난해 총선에서 집권 여당 르네상스당이 의석 과반을 달성하지 못해 불안하게 출발한 에마뉘엘 마크롱(46) 프랑스 대통령은 미래 세대를 위한 연금개혁에서 국론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함으로써 향후 국정 운영에 부담을 안게 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국민 60~70%는 “연금 개혁안에 반대한다”고 답하고 있다.

프랑스24에 따르면 하원이 이날 오후 표결할 총리 내각 불신임안은 ‘재적 과반 찬성 때 가결’이라는 턱을 넘지 못할 전망이다. 야당(총 318석) 가운데 개혁안에 동조하는 중도 우파 공화당(61석)이 표결에 불참하기로 당론을 모으면서다. 불신임안이 통과되려면 하원 577석 가운데 공석(4석)을 제외한 과반(287석)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좌파 연합 뉘프(149석), 국민연합(88석) 전원이 찬성표를 던져도 가결 정족수에 모자란다. 총리 불신임안이 부결되면 연금 개혁안은 바로 법률로 발효된다.

부결 가능성 높아, 곧바로 개혁안 발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AF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AFP=연합뉴스

앞서 지난 16일 프랑스 정부는 연금 개혁안의 상원 통과 후 하원 표결을 앞두고 정부 입법안을 의회 표결 없이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헌법 조항(49조 3항)을 발동했다. 집권 여당이 하원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결이 우려되자 마크롱 대통령이 꺼낸 승부수였다. 의회를 무력화한 '프리패스' 조항 발동에 야당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정부의 고압적인 방식은 의회에 대한 모욕이며, 프랑스 민주주의의 결점"이라며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표결 하루 전인 19일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AFP통신에 보낸 서한에서 “연금 개혁안은 수개월에 걸친 정치·사회적 협의 끝에 나온 타협의 산물”이라며 “개혁의 민주적 여정의 끝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지난 1월 10일 발표된 연금 개혁안은 2017년과 지난해 대선 기간 그가 내건 핵심 공약이다.

비록 불신임안이 부결되고 연금 개혁안이 발효되더라도, 마크롱 대통령이 입을 정치적 타격은 작지 않다. 19일 발표된 프랑스여론연구소 조사 결과,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28%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난해 5월보다 13%포인트 내렸다. 노란 조끼 시위로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던 지난 2018년 12월(23%) 이후 두 번째로 낮은 수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와 유권자 모두에게 그의 비전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BBC도 “마크롱이 대중 분노의 규모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금 개혁 혼란 뒤엔 佛극좌·극우 부상

프랑스 정부가 헌법 49조 3항을 근거로 연금 개혁안을 강행한 이틀 뒤인 18일(현지시간),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에서 열린 시위에서 시민들이 '왕과 그의 49.3(헌법 조항)에 죽음을'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프랑스 정부가 헌법 49조 3항을 근거로 연금 개혁안을 강행한 이틀 뒤인 18일(현지시간),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에서 열린 시위에서 시민들이 '왕과 그의 49.3(헌법 조항)에 죽음을'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마크롱이 이 같은 정치적 부담에도 총대를 멘 것은 그만큼 연금개혁이 절실해서다. 고령화·저출산의 늪에 빠진 프랑스는 일 해야 하는 젊은 세대가 줄어 들면서 연금 재정 개혁이 불가피한 상태다. 프랑스의 연금 재정은 2023년 적자로 전환해 2027년에만 연간 120억 유로(약 16조원)의 적자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경우 2030년까지 매년 최대 50억 유로(약 6조 6850억원)의 적자가 쌓일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극좌·극우로 양분된 프랑스 정치 지형은 연금 개혁에 대한 사회의 합리적인 논의에 되레 ‘걸림돌’로 작용했다. BBC는 정치평론가 알랭 뒤하멜을 인용해 "이 위기가 보여주는 것은 두 개의 프랑스가 존재한다는 것"이라며 프랑스 사회의 ‘위험한 양극화’를 지적했다. 고령화 문제를 겪는 여타 유럽 국가들도 연금 개혁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프랑스처럼 반대 여론이 압도적인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면서다. 프랑스 내 반대 여론은 “정년을 64세가 아닌 60세로 낮춰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 정치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인 제5공화국(1958년~) 이후 중도 우파의 드골주의자와 좌파 사회당이 번갈아 집권하며 상호 견제를 해왔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 등을 계기로 치솟는 실업률과 이민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고, 이를 틈타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이 높아져갔다. 마크롱 대통령 스스로도 2017년 대선에서 중도 우파·좌파에 대한 대안 세력으로 부각시켰다. 일자리를 늘리고, 재정적자를 해소하겠다는 공약을 앞세웠다. BBC는 “온건 좌·우를 몰아낸 마크롱은 오히려 극단 세력의 부상을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반정부 시위 몸살…“파리 쓰레기 1만t”

18일 파리에서 열린 시위에서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있다. 시위대는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올리려는 마크롱 대통령의 계획에 반대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8일 파리에서 열린 시위에서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있다. 시위대는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올리려는 마크롱 대통령의 계획에 반대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마크롱에 대항하는 야당 그룹은 극좌와 극우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현재 좌파 연합은 극좌 인사로 분류되는 '굴복하지않는프랑스'의 장 뤽 멜랑숑이 이끌고 있다. 온건 좌파 세력인 사회당은 2017년 대선 1차 투표에서 6.3%, 지난해 대선에서 1.7%로 참패했다. 중도 우파인 공화당 역시 2017년 대선에서 유력 후보인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가 부패 스캔들로 추락한 뒤로 대중의 신뢰를 좀처럼 회복하지 못 하고 있다. 지난 대선 이후로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 국민연합 전 대표가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했다.

정부의 연금 개혁안 강행 이후 20일까지 프랑스 곳곳에선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파리에선 수백 명의 사람들이 19일 밤늦게까지 시청 앞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주말 동안 시위대 일부는 경찰에게 폭죽과 병 등을 던지고, 거리의 쓰레기통과 차량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파리 하원 맞은편에 있는 콩코르드 광장 등에서 집회를 금지하고 있는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해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프랑스 주요 노동조합 연합은 오는 23일 9차 파업을 예고했다. “미화 노동자의 파업으로 파리에선 쓰레기가 1만t 이상 쌓였다”고 르파리지앵은 전했다.

프랑스의 연금 개혁안은 현행 62세인 정년을 오는 9월 1일부터 매년 3개월씩 단계적으로 연장해 2027년에는 63세, 2030년까지는 64세로 늘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금을 삭감하지 않고 100% 받을 수 있는 사회보장 기여 기간도 42년에서 43년으로 1년 연장하는 시기도 2035년에서 2027년으로 앞당긴다. 대신 최소 연금 수령액을 최저임금의 75% 선(월 1015유로·약 135만원)에서 85%인 월 1200유로(약 160만원)로 올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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