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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수수색 영장 작년 39만건 청구…검찰 “통계적 착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지난해 압수수색 청구 건수는 39만6671건. 하루에 1000건이 넘는 압수수색 영장 청구서가 법원으로 향하는 셈이다. 이 중 법원이 기각한 것은 3만5195건에 불과해 영장 발부율은 91.1%에 달한다. 최근 10년간 압수수색 영장 청구·발부 건수는 꾸준히 증가세다. 10만8992건 청구에 9만5123건이 발부됐던 2011년에 비해 네 배 가까이로 늘어난 것이다. 기업들은 심지어 위법을 예방하거나 자정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로펌의 법률자문을 받은 문건까지 압수수색의 타깃이 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기업 “위법 막을 로펌 자문문건도 압수”

한 대기업 법무실 관계자는 “리스크 관리를 위한 자문 과정에서 로펌과 주고받은 자료를 압수해 그걸 법정에서 유죄 증거로 써먹는 걸 봤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신라젠 경영진과 공모해 신라젠 신주인수권부사채 가장납입을 설계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DB금융투자 임원 이모씨 역시 압수된 변호사의 법률 검토 의견서가 결정적 증거로 작용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최근 5년간 압수수색 영장 청구 건수

최근 5년간 압수수색 영장 청구 건수

저인망식 압수수색 과정에서 특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영역이 ‘전자정보 압수수색’이다. 압수수색 영장이 ‘관련 자료 일체’의 형태로 표현된 검찰의 청구대로 발부되는 경우가 잦은 상황에서 휴대전화나 PC 메모리에 저장된 방대한 정보 중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관련 자료’인지가 늘 논란이다.

대법원이 전자정보 압수수색의 적격 요건을 제한해 가고 있기는 하다. 전교조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수사기관이 컴퓨터들을 그대로 수사기관 사무실로 가져가 복사하자, 전교조 등이 준항고와 재항고를 제기한 사안에서 2011년 대법원 특별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전자정보 압수수색의 적법 요건을 처음 제시했다.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혐의 사실과 관련된 부분만을 문서 출력물로 수집하거나 수사기관의 저장매체에 파일을 복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답을 내놨다. 다만 “PC 등 저장매체나 복제본을 직접 외부로 반출해 파일을 압수수색하는 것은 영장에 기재돼 있거나 부득이한 사정이 발생했을 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며 재항고를 기각했다.

검찰 “은어로 문건 숨기는 경우 많아”

저인망식 압수수색에 대한 불만에 대해 검찰은 “수색을 해야 뭘 압수할지 파악할 것 아니냐”고 반응한다. 특히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저장된 전자정보의 경우 ‘범죄 관련’이라고 제목을 달아 놓는 피의자는 없기 때문에 폴더와 파일을 일일이 열어봐야 혐의 관련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수사과정에서 발견된 시행업자들 간 지분 비율이 적힌 문서의 제목은 ‘골프 잘치기’였다. 또 한 시행업자의 휴대전화에서 발견된 “2021년 12월 27일. 드론. 강남”이라는 메모의 ‘드론’은 이 대표의 측근인 김용 전 민주연구원장을 칭하는 ‘드래곤(용)’의 줄여 표시한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압수수색에 대비해 은어와 비유로 주요 문건을 숨기는 경우가 많다”며 “법관이나 기업의 요구대로 영장청구서에 검색어와 검색 대상 기간 등을 세세히 적는 건 ‘수사의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라 말했다.

검찰은 압수수색 건수 급증은 ‘통계적 착시’가 있다고도 반박한다. 검찰에 따르면 ‘계곡 살인’ 피의자 이은해가 동거남 조현수와 4개월간 도주했을 때 이들을 잡는 데까지 총 35건의 압수수색이 필요했다. 포털사이트 접속, 대포폰 개통, 톨게이트 통과, 숙박업소 결제, 병원 진료, 음식 배달앱 이용, 온라인 게임 접속 등 파악할 수 있는 사안을 확인하려고 할 때마다 건건이 영장이 필요했다. 지난해 11월 제2의 ‘n번방’ 성착취물 유포자를 호주에서 체포하는 과정에서도 피의자를 특정하는 데만 검경은 220회의 압수수색을 벌였다.

검찰의 해명에도 대법원은 압수수색 남발을 통제할 카드를 꺼내들었다. 지난달 3일 대법원이 내놓은 ‘압수수색 영장 대면심리제’ 도입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판사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기 전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관련 정보를 알고 있는 인물이나 검사 등’을 불러 심문할 수 있다. 검찰은 반발하고 있다.

“변호사·의뢰인 비밀유지권 법제화를”

대면심리제에 대해선 냉소적 분위기인 변호사 업계는 영미식의 ‘변호사-의뢰인 비밀유지권(Attorney-Client Privilege)’ 입법화를 바라고 있다. 변호사-의뢰인 비밀유지권이란 변호인과 의뢰인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이나 문서는 추가 범죄 예방 목적이 분명하다거나 변호인에게 범죄 혐의가 뚜렷한 경우 등 특별히 공익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압수수색 영장 심사 단계에서 압수수색 대상에서 배제하도록 하는 제도다.

19대 국회 이후 비밀유지권 도입을 골자로 한 변호사법 개정안은 계속 발의됐다. 그러나 여전히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이태형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7년 발표한 ‘변호사의 비밀유지 의무’ 논문에서 “비밀유지권을 도입하되 그 예외가 되는 ‘중대한 공익상의 이유’를 가능한 유형별로 나눠 구체화하자”는 취지의 입법 방향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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