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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주 69시간’ 논란이 알려주는 것

중앙일보

입력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5년만 버티면 된다’가 아니라 ‘1년만 버티면 된다’가 됐습니다.” 최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포럼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이 한 말이다. 대선이 5년마다 치러지니 패한 정당이나 지지자 사이에선 ‘버틴다’는 표현이 쓰이곤 했다. 그런데 여야 정치권이 요즘은 1년 가량 남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 모두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총선에서 제1당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인 것이 배경이라고 김 의장은 설명했다. 실제 여론조사에서 양대 정당의 지지율은 큰 차이가 없다. 여기에 지난 대선이 역대 최소 표차로 승부가 갈렸고 역대 최대 의석수 차이의 여소야대 국회인 상황이 더해져 있다. 여야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다.

 예비후보자 등록 시작이 9개월도 안 남을 정도로 총선이 다가왔음을 실감한 건 ‘주 69시간 근무’ 논란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신속한 대응을 보면서다. 어제 윤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 대통령실 안상훈 사회수석이 현안브리핑에 나섰다. 그는 “연장 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는 윤 대통령의 입장을 전했다. 방일이라는 대형 이슈 속에서도 노동시간 개편안 보완 입장을 전하느라 애를 쓴 것이다.

여야 “1년만 버티자” 분위기
MZ, 과거사보다 69시간 민감
유권자가 심판할 총선 임박

 윤 대통령은 근무시간 유연화를 노동개혁 국정과제 중에서도 우선 순위에 뒀었다. 대통령실이 앞장서 신속히 재검토를 밝힌 것은 ‘MZ 세대’ 표심의 이탈을 막는 게 시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에선 세대별 지지 구도가 깨졌다. 과거 60대 이상은 보수 정당 지지세가 뚜렷한 반면 20~30대는 진보 정당 지지 경향이 강했었다. 하지만 지난 대선 출구조사에 따르면 MZ 세대 남성은 윤 대통령에게 많은 표를 줬다. 고령화로 60세 이상 유권자가 전체의 30%가량을 차지하고 투표율도 높긴 하지만, 40~50대에서 진보 성향이 더 높다는 걸 고려하면 젊은 세대의 표를 확보하지 못하고선 여권이 총선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여론조사에서도 MZ 세대는 윤 대통령의 강제징용 보상 해법인 ‘제3자 변제’보다 노동시간 개편안에 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갤럽의 지난 8~9일 1002명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20대에서 19%, 30대에서 13%에 그쳐 다른 연령대보다 낮았다. 특히 전체 지지율은 2%포인트 떨어졌지만 20대는 5%포인트, 30대는 10%포인트나 하락했다. 이와 달리 제3자 변제 방안에 대해선 20대의 30%가 찬성 입장을 보였다. 젊은 세대에게 강제징용 이슈보다 주 69시간제 파급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고).

내년 총선에서 과반을 못 얻으면 레임덕이 올 것(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란 전망이 나오는 여권만 급한 게 아니다.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패하고 이재명 당 대표의 사법리스크에다 내분까지 겪는 민주당도 총선에 존망이 달려있다. 민주당은 주 69시간제 개편을 비판하면서 이 대표부터 청년층을 만나며 이슈화하려던 참이다. 근로시간 개편은 법 개정 사안이라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의 동의 없이는 국회 통과가 어렵다. 정부의 보완책을 봐야겠지만, 민감한 MZ 세대 표심을 놓고 여야의 치열한 수 싸움이 예상된다.

정부·여당은 이참에 엉성한 국정과제 추진 체계를 이대로 두고선 민심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선 때 윤 대통령은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120시간이라도 일하고 이후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논란을 낳았었다. 이번에 발표된 개편안도 ‘120시간’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연장 근무를 더 하고 원할 때 푹 쉴 수 있다는 논리가 바탕이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가 전문가들로만 꾸린 연구회가 내놓은 안은 여러 설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연차를 다 못 쓰는데 가능하겠느냐”는 단순한 질문을 풀어내지 못했다. 문제가 터진 뒤에야 한덕수 국무총리가 고용노동부 장관 등을 질타했다는데, 정부가 입법예고까지 한 법안에 대해 대통령실이나 관련 부처, 여당 어디에서도 사전에 예상되는 문제를 걸러내지 못한 게 여권의 현 주소다.

주 69시간제 논란은 선거의 계절이 다가왔으며,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성별로도 지지 성향이 갈리고 이해가 걸린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MZ 세대는 선거의 뚜렷한 변수로 부상했다. 대화와 양보에 관심 없고 진영별 강경론에 빠진 여야가 앞으로 다양한 이슈에서 어떤 생존법을 찾아낼지 지켜보고 평가할 일이다.

글=김성탁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