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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대신 쓰레기만 가득한 ‘지렁이농장’… “지대 5~6m 높아졌다” 경찰 수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6일 오후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의 한 벌판. 듬성듬성 서 있는 농막 사이로 노란색 포크레인 한 대가 흙을 퍼서 양옆으로 쌓아 올리고 다시 덮는 식으로 땅을 다지고 있었다.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이곳엔 200여동에 달하는 비닐하우스가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하우스 안엔 작물 대신 하수 슬러지(하수처리 과정에서 생기는 침전물) 등 폐기물만 가득했다. 폐기물을 버린 건 해당 부지에 지렁이 사육 농장을 운영하던 50대 남성 A씨였다.

“입 벌리면 파리 들어와 밥 먹다 눈물”…고통의 10년

16일 오후,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의 한 자연녹지지역에 포크레인 한 대가 서 있다. 이곳에는 지난해까지 10년 넘게 지렁이 농장이 들어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청과 인근 주민들은 업주가 지렁이 농장을 가장해 폐기물을 불법 매립해 왔다고 보고 있다. 최서인 기자

16일 오후,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의 한 자연녹지지역에 포크레인 한 대가 서 있다. 이곳에는 지난해까지 10년 넘게 지렁이 농장이 들어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청과 인근 주민들은 업주가 지렁이 농장을 가장해 폐기물을 불법 매립해 왔다고 보고 있다. 최서인 기자

고양경찰서는 지렁이 농장을 운영한다는 명목으로 10여년간 슬러지 등 폐기물을 불법 매립한 의혹을 받고있는 A씨를 지난 1월 폐기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입건해 조사 중이다. 경찰과 지자체에 따르면, A씨는 2012년 경기 고양시 한국항공대학교 뒤편 부지에 지렁이 농장을 운영하겠다며 재활용업 사업 신고를 했다. 지렁이 농장은 하수처리장 슬러지나 음식물쓰레기 등을 지렁이에게 먹여 사육하고, 지렁이가 만든 분변토를 다시 비료로 판매한다.

그러나 인근 주민들은 “지렁이라곤 한 마리도 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주민들은 A씨가 지난 10여년 동안 지렁이가 소화할 수 있는 양 이상의 슬러지와 폐기물을 받아와 매립하면서, 해당 부지가 사실상 지렁이 농장이 아닌 쓰레기장으로 변했다는 의혹을 제기해 왔다. 인근에서 아로니아를 재배하는 최모(65)씨는 “밤이면 25톤 트럭 10여대가 지렁이 농장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슬러지를 얼마나 묻었는지 10년 새 그 지역의 지대가 주변보다 5~6m는 높아졌다”며 “처음엔 농장이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인근 농민들로부터 땅을 임대해서 규모를 늘리더니 주변 국유지까지 무단으로 확대해 3만평(약 10만㎡)정도까지 커졌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이 찍어 둔 과거 A씨가 운영하던 슬러지 사진의 내부 모습. 최서인 기자

주민들이 찍어 둔 과거 A씨가 운영하던 슬러지 사진의 내부 모습. 최서인 기자

특히 주민들을 괴롭힌 건 대량의 폐기물이 썩으면서 발생하는 냄새와 파리떼였다. 농장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에서 유통업을 하는 한 주민은 “매년 봄이면 파리 때문에 밥을 못 먹었다. 밥을 먹으려고 해도 숟가락마다 파리가 앉아 밥 먹다가 울음을 터뜨린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봄이면 북서풍을 타고 1㎞ 밖까지 퍼지던 냄새를 ‘음식물쓰레기 썩는 냄새의 100배’, ‘똥찐 냄새’라고 표현했다. 인근에서 벼농사를 짓는 또 다른 주민은 “장마철이면 지렁이 농장에서 썩은 물이 흘러 들어와 벼가 픽픽 쓰러지고 쭉정이만 남았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 착수… 주민들은 “시청·구청이 직무유기”

17일 오후 지렁이 농장 터(우)와 인접한 논(좌)의 모습. 주민들에 따르면 지렁이 농장도 원래는 죄측의 논과 지대가 같은 평평한 농지였는데, 수년에 걸쳐 지대가 5~6m 높아졌다. 최서인 기자

17일 오후 지렁이 농장 터(우)와 인접한 논(좌)의 모습. 주민들에 따르면 지렁이 농장도 원래는 죄측의 논과 지대가 같은 평평한 농지였는데, 수년에 걸쳐 지대가 5~6m 높아졌다. 최서인 기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 건 농장이 생긴 지 10년이 흐른, 지난해가 돼서였다. 민원을 받고 현장 답사에 나선 고양시청 직원들은 농장에 슬러지를 처리할 만큼의 지렁이가 없으며, 폐기물 무단 투기와 무단 매립이 이뤄지고 있다고 봤다. 시청 관계자는 “위반사항이 있었다고 판단해 지난해부터 관련 법령에 따라 영업정지 등의 조치를 계속했다”며 “지렁이 농장도, 폐기물 매립지도 겉으로 봐서는 결국 다 흙이다 보니 언제부터 불법행위가 시작됐는지 파악하기 위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이뤄진 수사 의뢰 건에 대해 경찰은 증거 불충분 판단을 내리고 불송치 처리했다. 고양경찰서 관계자는 “상당 시일이 지난 후에 사건이 접수된 상황이었다. 이미 농장은 철거된 상태여서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시청은 지난 1월 재차 수사를 의뢰하고 동시에 A씨에겐 3월까지 해당 토지를 원상 복구하라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또 재활용업 등록 취소 절차도 밟고 있다. 경찰도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며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농장이 지렁이 사육 목적을 상실한 채 사실상 쓰레기 불법 매립지로 사용돼 왔는지 수사 중이다. 현재 해당 부지에선 흙을 뒤엎고 땅을 다지는 작업도 한창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주민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이미 피해가 절정이던 시기는 지났다. 처음부터 법대로만 했더라면 긴 시간 참담한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구청과 시청 등이 사실상 직무유기를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민인 이모씨는 “이 동네 사람들은 민원을 넣다가 넣다가 결국엔 포기해버렸다. 10여년간 시청과 구청에 수십 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와서 둘러보기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며 “파리떼가 꼬이니 살충제를 뿌려준 게 지자체가 한 일의 전부”라고 했다.

또한 농장을 치우는 작업에 대해서도 “들어온 슬러지를 도로 쳐내지 않는 이상 복구라고 할 수 없다”며 “형사처벌과 원상복구를 원한다”는 입장이다. 농장 인근 마을에 거주하는 B씨는 “위에 흙을 덮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며 “겉보기에 괜찮아도 장마철이 되면 침출수가 흘러나와 지하수로 스며들 거다. 슬러지가 썩으면서 발생하는 열은 또 어떡하냐”고 토로했다.

A씨는 “사업 초기에는 채소 껍데기를 받아서 파리가 끓는 등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7~8년 전 일이고 이후 슬러지만 들여오면서 문제가 해소됐다”며 “시청에서는 육안으로만 보고 폐기물이라고 판정했고 지렁이도 없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폐기물이 아니라는 시험성적서가 있고, 지렁이도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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