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진의 기억] 고단한 가운데 꿋꿋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31호 35면

‘청계천’ 시리즈 가운데 만물공구노점상, 1997년. Ⓒ이한구

‘청계천’ 시리즈 가운데 만물공구노점상, 1997년. Ⓒ이한구

사진가 이한구가 처음 ‘청계천’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8년이다. 호기심에 눈이 반짝이던 스무 살 사진과 학생이었으니, 보는 것마다 오른손 검지가 움찔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바깥’보다는 ‘안’으로 시선이 더 갔다.

동묘 옆 초등학교를 다닌 그에게 매일 오가던 청계천은 흥미롭고 신비로웠다. 친구들은 목재소나 철공소집 아들, 식당집 딸이었다. 포목상집 남매는 한때 청계천의 대명사였던 삼일아파트에 살았다. 코흘리개들과 청계천을 누비며 놀았다.

성장한 이후로 다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몇몇은 다시 흘러들어왔다. 인쇄소에서 일하거나 선반공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한구는 대학생이 되어 그곳에서 다시 그들을 만났다. 필름에 서울 청계천변 삶의 풍경들이 담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사체로서의 청계천이 새롭게 보였다. 섬유·전자·전기·의료·기계 등 제각기 물성과 형태가 다른 것들의 밀집이 조형적으로 흥미로웠다. 화려한 대도시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으면서도 누추하고, 이상하게 당당하고, 활기차면서도 어딘지 쓸쓸한 대립각의 정서도 좋았다. 더구나 그 안에 헤아릴 수 없는 삶들이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횟수가 드문 해도 있었으나, 카메라를 메고 청계천을 들고 난 세월이 지금까지 30여 년이다. 비 오면 비가 와서, 눈이 오면 눈이 와서, 흐리면 흐려서 청계천에 나갔다. 변함없는 진득함으로 청계천의 변화를 목도했다. 어쩌면 사진가인 자신도 여러 잡다한 청계천의 구성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가 1997년에 촬영한 이 사진은 청계천이 한창 활기를 띠던 시절 어느 노점의 풍경이다. 한 치 빈틈도 없이 날카롭고 기괴한 공구들이 나름의 질서로 빼곡히 진열돼 있고, 가운데 협소한 자리에 주인이 앉아 있다. 그의 생계일 중고 공구들 틈에서 미동도 없이 반듯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평 남짓한 노점과 그 속의 공구들과 함께 온몸으로 자신의 생애를 밀며 나아가는 중이다.

이한구의 이 ‘청계천’ 사진은 사진이 보여주는 ‘실재’ 너머, 고단한 가운데서도 꿋꿋한 우리들 모두의 삶을 은유한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