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치적 올바름’의 역설, 인종·성차별 덧칠로 개선 안 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31호 28면

김진경의 ‘호이, 채메’

김진경 칼럼

김진경 칼럼

학교에 다녀온 딸이 아이들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시작은 가벼운 말놀이였단다. 단어의 철자를 거꾸로 읽는 게임이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독일어 단어 Hose(‘호제’, 바지)를 제시하면, 거꾸로 Esoh(‘에조’)라고 대답하는 놀이다. 게임 중 한 아이가 regen(‘레겐’, 비 내리다)이라는 단어를 말했고, 다른 아이가 이것을 거꾸로 해 ‘Neger’(네거)라고 답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Neger는 흑인을 비하하는 ‘검둥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영어로 치면 니거(nigger), 심각한 인종 폄하 표현이라 다들 ‘N 워드’라고만 하는 그 단어다.

로알드 달 소설 ‘뚱뚱한’ 등 표현 삭제

같은 교실에 있던 흑인 아이 둘이 Neger라는 말을 한 아이에게 다가가 “너는 절대 쓰면 안 되는 말을 썼으니 이제 큰일이 날 것이다. 너희 부모님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걱정이 된 아이는 엉엉 울고, 영문을 몰랐던 딸은 친구들에게 Neger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흑인 아이들이 이번에는 딸에게 “Neger는 흑인 외에는 절대 쓰면 안 되는 말이다. 특히 너 같은 백인이 그 말을 쓰면 경찰에 잡혀간다”고 했다.

Neger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불안했던 딸은 집에 와서 내게 물었다. “엄마, Neger가 도대체 뭐야? 무서운 말이야?”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그 단어는 미국에서 흑인을 노예로 부릴 때부터 쓰던, 흑인을 낮춰 부르는 말이니 쓰면 안 된다고, 그 말을 들은 흑인은 아주 기분이 나쁠 것이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거기서 그칠 수는 없었다. 딸에게 물었다. “게임을 하다가 regen을 거꾸로 읽어 Neger라고 말한 친구가 뭘 잘못했을까? Neger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물어보는 건 잘못일까? 어떤 단어를 써도 되는 사람이 있고 쓰면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뭘까? 그 흑인 친구는 엄마가 한국인인 너를 왜 백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세상이 흑인 아니면 백인으로 나뉘는 걸까?”

로알드 달의 책들. 출판사는 일부 단어를 삭제, 수정 후 재출간 했다. [AP=연합뉴스]

로알드 달의 책들. 출판사는 일부 단어를 삭제, 수정 후 재출간 했다. [AP=연합뉴스]

딸과 대화하며 이런 주제를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딸이 다니는 취리히의 초등학교 5학년 학급 아이들 23명 중에는 부모가 둘 다 스위스인인 아이가 한 명도 없다. 부모 둘 중 한 명만 스위스인이거나, 딸의 경우처럼 둘 다 외국인이다. 다문화 환경에서 서로 배우는 것도 많지만 부딪칠 때도 적지 않다. 부딪치면서 배우면 좋은데, 그러자면 조건이 마련돼야 한다.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며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분위기,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과 열린 태도, 차별과 혐오로 얼룩진 역사에 대한 교육 등이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인종이나 성에 관한 갈등은 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도 가볍지 않은 문제지만,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질문과 토론은 어째 더 줄어드는 것 같다. 최근 작가 로알드 달의 작품 재출간 소식을 듣고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등 영어권에서는 읽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내기가 더 어려운 작품들을 쓴 작가다. 아동문학이 아닌 그의 단편 소설들은 허영, 질투, 분노 같은 인간 본능의 어두운 심연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것들이 많다. 감추고 싶은 나의 결함이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재현된 걸 읽으며 서늘한 마음으로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의 작품 속에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서 벗어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로알드 달이 묘사하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어딘가 꼬인 채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판사 퍼핀이 이런 ‘공격적’ 단어들을 삭제 또는 수정해 작품들을 재출간한다고 한다. ‘뚱뚱한(fat)’, ‘못생긴(ugly)’ 같은 외모 비하적 표현들을 없애는 게 주요 변화다. 1990년에 사망한 작가의 동의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수정 근거가 이른바 ‘감수성 독자(sensitivity readers)’들이 ‘현대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표현이라는 점은 더 큰 문제다. 엄연히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문제를 덮어 버려 그것을 개선할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외모 비하 표현이 사라진 책을 읽는 아이들은 외모 비하 표현이 왜 문제인지 생각해 볼 기회가 없다. 그리고 현실에서 외모 비하 표현은 여전히 활개를 친다.

실화를 다룬 영화 ‘에어로너츠’. 작품에서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다. [사진 네이버 영화]

실화를 다룬 영화 ‘에어로너츠’. 작품에서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다. [사진 네이버 영화]

문제 제기를 차단하는 다른 사례를 보자. 톰 하퍼 감독의 영화 ‘에어로너츠’(2019)는 19세기에 열기구 비행을 했던 영국의 두 탐험가에 대한 내용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나 영화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1862년에 런던에서 열기구 비행을 한 것은 제임스 글레이셔와 헨리 콕스웰이라는 두 남성이었으나 영화는 헨리 콕스웰을 어밀리아 렌이라는 여성으로 바꾼다. 그 이유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강하고, 똑똑하고, 흥미로운 여성 캐릭터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성 고정관념의 지배를 받아 왔죠. 우리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잡지 타임 인터뷰, 2019년 12월 9일자)

맞는 말이다.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어도 영화는 창작물이므로 인물이나 사건을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에어로너츠’의 경우 감독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세기 중반에 영국 학술원에는 여성 과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도 이 비율은 약 10%에 그친다(2019년 기준). ‘에어로너츠’에서처럼 남성과 여성이 협력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분홍빛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성차별 개선의 출발점은 오점 많은 과거를 정확히 직시하는 일이다. ‘일어났었더라면 좋았을 일’로 과거를 덧칠하면 현재가 나아질까. 스위스 일간 NZZ은 영화의 성별 변경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현대적 재해석(presentism)으로 역사적 사실은 덧칠되고, 부정되고, 악마화된다. 문명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깨어 있는(woke) 서구인들은 역사 왜곡을 선호한다.”

실화 다룬 영화 ‘에어로너츠’ 성별 바꿔

‘깨어 있는’ ‘깨달은’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구어체 형용사 ‘woke’의 기원은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커뮤니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각성을 의미했다. 그러다 BLM(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 등을 계기로 소셜 미디어에서 널리 퍼졌고 2017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었다. ‘사회적, 정치적 사안, 특히 인종차별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이라는 정의 아래에는 별도의 설명이 달려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들이 실제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이런 사안에 대해 너무 예민해 하거나 너무 발언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 종종 못마땅해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못마땅해’하는 이들에 의한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 심리 및 행동)는 이미 진행 중이다. 스위스의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은 ‘woke라는 광기에 대항한 싸움’이라는 구호까지 내걸고 반woke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우리는 더이상 woke 운동가들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지 듣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낙인 찍히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기득권자들이 차별, 낙인 운운하는 것이 터무니없으나, 실제 스위스뿐 아니라 유럽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이 힘을 키우고 있다. 이들이 백래시에 쓸 무기를 쥐게 된 과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Neger라는 단어를 써도 된다거나 영화에 강하고 똑똑한 여성 캐릭터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질문을 차단한 채 ‘모르면 외우라’고 하거나 어두운 과거를 덧칠하는 지금의 운동 방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고민해 보자는 거다.

김진경 작가. 김진경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