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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에 브랜디 넣은 포트 와인, 영국인 사로잡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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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호 24면

손관승의 와글와글

포트 와인용 포도는 포르투갈 도우루강 주변의 가파른 경사지에서 자란다. 군데군데 계단식 포도밭도 보인다.

포트 와인용 포도는 포르투갈 도우루강 주변의 가파른 경사지에서 자란다. 군데군데 계단식 포도밭도 보인다.

지루한 겨울이 끝나는 것을 기념해 그리고 두 달에 걸친 나의 제주도 자유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을 자축하며 르네 플레밍의 매혹적인 노래를 듣는다. ‘당신은 모를거야’(You will never kow). 그렇다. 나는 지금 아무 곳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그것이 주는 자유로움의 매력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중얼거리며 따라 부른다. 정통 오페라 성악가였던 르네 플레밍이 재즈 가수로 변신해 부르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노래다. 그녀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무대에 섰을 때 거장 게오르그 솔티로부터 더블 크림처럼 깊고 풍부한 목소리라는 찬사를 들었다고 하는데, 이 재즈풍 목소리에는 오히려 베리와 초콜릿 맛이 풍긴다.

디저트로 주로 마시는 포트 와인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방안을 찾아보니 포트 와인 딱 한 병 남았다. 포트 와인은 색에 따라 크게 4가지로 나뉘어 화이트, 로제, 루비, 토니가 있는데 내 방에 있는 것은 루비다. 이름 그대로 루비색의 디저트 와인인데 다행히 이 노래와 매칭이 아주 잘된다. 처음 포르투라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포트 와인을 오렌지에 뿌려주던 동네 골목 카페 주인이 떠오른다.

“이게 우리 포르투 사람들이 포트 와인을 즐기는 방식이죠.”

포트 와인은 포도주에 브랜디를 첨가한 달고 독한 강화 와인(Fortified wine)이기에 그처럼 만들어 먹는지도 모른다. 오렌지 대신 제주도에 흔한 귤과 한라봉 위에 포트 와인을 뿌려 먹어보지만 공간이 바뀌어서인지 그때 그 분위기는 아니다. 포트 와인이란 이름도 포르투갈이란 이름도 모두 포르투라는 도시와 항구에서 나왔다.

3월은 포르투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팬데믹이 창궐하기 직전에도 3월에 방문했다. 이 도시는 발바닥으로 만나야 한다.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노면 전차가 느릿느릿 다니는 언덕 위의 비좁은 구시가지 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니려면, 여행자 내면의 유랑까지 즐기려면 무조건 그래야 한다. 게다가 도우루강이 있지 않은가?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낭만적인 강의 존재로 인해 실제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도시가 바로 포르투다. 우리가 오랫동안 오로지 대륙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 도시 사람들은 해양을 응시하였다. 한국과 포르투갈 모두 대륙의 끝에 달려있는 작은 나라이지만 관점의 차이가 큰 격차를 낳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과거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다. 강을 따라 흐르는 보트에 포도주 광고가 실려 있었으며 테일러(Tayler‘s), 그라함(Graham’s), 오프레이(Offley), 샌드맨(Sandeman), 다우(Dow) 등 대부분 영국 이름들이다. 포르투갈 제2의 도시에 왜 영국 이름 투성이인가? 그렇지 않아도 무명의 영국 여자 조앤 롤링이 이 도시에서 결혼해 살다가 이혼한 뒤 모국으로 돌아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터뜨리는 바람에 가는 곳마다 그녀의 이름을 상품화하고 있는 포르투였다.

그 비밀은 도우루 강 북쪽 구시가지에 있는 ‘팩토리 하우스’(Factory House)에서 찾아야 한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600년 교류 역사와 포트 와인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17세기부터 오포르투 항구를 중심으로 포트 와인을 거래하던 영국 상인들은 이권단체를 조직해 정규적인 회합을 가졌는데 그 모임 건물을 가리켜 팩토리 하우스라 불렀다. 18세기 후반 현재의 건물로 옮겨와 활동 중이다.

포트 와인. [중앙포토]

포트 와인. [중앙포토]

매주 수요일마다 팩토리하우스에 열리는 ‘수요 점심’(Wednesday Lunch)이라는 모임이 핵심, 영국인 혹은 영국계 후손으로 포트 와인을 거래하는 회사에만 문호가 개방되는 배타적 이익단체다. 대표적인 회사 테일러는 설립연도가 16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다. 현재의 회원 수는 25명, 회원들은 점심 모임에 업무와 관련 있는 다른 회사나 큰 고객, 영향력 있는 언론인을 초청할 권한이 있다. 회원들에게는 크고 작은 규약이 있는데 그중 재미있는 것은 회원별로 각자 자신의 상표가 들어 있는 10개에서 15개의 와인 보관함에 와인을 채워 이곳에 제출해야 하는데, 특별한 저녁 행사에 돌아가며 그 와인을 상표를 가린 채 내어놓은 뒤 빈티지 알아맞히기 게임을 한다고 한다.

영국은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인들이 와인 맛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이미 중세에도 와인 사랑은 대단했고 포도주를 좋아한 셰익스피어는 ‘헨리 8세’에 멋진 문장을 남겼다. “좋은 동반자, 좋은 와인, 좋은 환대는 좋은 사람을 만든다.”(Good company, good wine, good welcome, can make good people.)

영국의 주된 와인 수입처는 보르도 지역이었다. 한동안 그곳을 영국이 지배했던 덕분인데,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패한 뒤 보르도 와인 공급도 끊겼다. 이미 포도주 맛에 길들여진 영국의 귀족과 부호들은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가 찾아낸 지역이 지금의 포르투와 인근 지역. 하지만 장거리 해상 운송 도중 와인이 식초처럼 변질되는 사고가 잇따랐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와인업자들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브랜디를 포도주에 인위적으로 첨가하면 발효가 중지되어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술이 바로 포트 와인이다. 그건 영국 측의 이야기이고 포르투갈 사람들은 자신들이 먼저 그 비법을 알아냈다고 주장한다.

포트와인은 높은 도수의 술을 좋아하는 영국인의 미각에도 딱 맞았다. 원래는 생산지역 이름에 따라 포르투라고 해야 하지만 영국인이 주도했기에 영어로 포트 와인이란 이름이 국제적으로 굳어졌다. 포르투의 도우루 강을 따라 히베이라(Ribeira) 지구에 가면 와인바들이 몰려 있어 다양한 포트 와인을 경험할 수 있다. 10유로 정도면 간단히 한잔 할 수 있지만 형편이 좋은 사람은 30~40년 성숙시킨 빈티지, 100년 이상된 최고급 토니(Tawny) 포트도 능력이 된다면 물론 즐길 수 있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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