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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요리 시작하는’ 세 청춘, 어쩌다 서울 상륙작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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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호 30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남대문점에 모인 한상연·노보원·김은희 공동대표(왼쪽부터). [사진 어쩌다농부]

남대문점에 모인 한상연·노보원·김은희 공동대표(왼쪽부터). [사진 어쩌다농부]

적수공권(赤手空拳), 그야말로 피 끓는 붉은 손과 빈주먹으로 세 청년이 뭉쳤다. 한상연(35)·김은희(34)·노보원(29)씨 모두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졸업을 앞둔 20대였다. 2016년 춘천의 소멸되는 전통시장 되살리기 프로젝트 도움을 받아 음식점을 열었다. 그들이 6년 3개월 만에 서울로 진격했다. 춘천에 분점 두 곳을 내고, 네 번째로 서울 한복판에 직영 점포를 낸 것이다. 지하철 4호선 회현역 4번 출입구, 남대문시장 맞은편에 문을 연 ‘어쩌다농부 남대문점’이다. 상호를 영어로는 ‘Oopsfarmer’라고 표기한다.

전통시장 창업 프로젝트 연 닿아 개업

사흘간 임시영업을 하고 정식개업 첫날인 2월 28일 점심시간에 서울 점포를 찾아갔다. ‘농부네텃밭소보로’라는 메뉴를 주문해 먹어봤다. 텃밭을 모티브로 구성한 메뉴로, 5가지 쌈 채소를 그릇에 깔고 브로콜리·파프리카·새송이버섯 등 구운 채소, 무농약 GMO 프리 옥수수, 적양배추 채 등을 밥 주위에 가지런히 담은 후 다져서 볶은 무항생제 돼지고기와 잘게 썰어 튀긴 양파를 넉넉히 올렸다. 와사비 간장에 비벼 먹는 게 맛의 묘수. 건강한 음식일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맛도 젊은이들이 좋아할 요소를 두루 갖췄다.

출발은 음식점이 아니라 농사였다.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면 경제성이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어쩌다가 농부의 길에 접어들었다. 정말 ‘Oops’다.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한씨는 유전공학과 학생이던 2013년 집안 선산에 딸린 밭 6600㎡(2000평)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철원에서 3만3000㎡(1만평) 논에 오대쌀 농사를 짓는 아버지가 별로 힘들지 않아 보여서 만만하게 여겼다. 경작을 하니 밭은 태평양처럼 넓게 다가왔다. 경기도 안산의 고교동창 김씨가 함께 했다. 2년을 버텼다.

열정은 과욕으로 표출됐다. 첫해 여러 가지 쌈 채소와 토마토·참외·수박 등 50여 가지 작물을 심었다. 결과는 반타작. 작물 절반은 실패하고 수박과 참외는 제법 거둘 만한 게 있었다. 그런데 판로가 없었다. 궁리 끝에 온라인이나 벼룩시장에서 직거래했다. 음식점 납품도 했지만 잠시였다.

2015년 농장을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고, 좋은 농업과 경제성 두 덕목을 충족하면서 지속 가능한 농사의 길을 개척하려고 전국 모범농가를 찾아다녔다. 한씨의 학과 후배인 경기도 용인 출신 노씨가 동행했다. 귀인의 도움도 있었다. 벼룩시장에서 알게 된 공익활동가 김원일 현 서울시 상생사업단장이다. 청년들을 인도해 2박 3일간 바람직한 농장 견학과 개인 교습을 해줬다. 김 단장은 “심지가 굳고 생각이 바르고 뭔가를 갈망하는 게 느껴졌던 젊은이들이었다”고 기억했다.

곤드레나물·시래기·고사리·버섯 넣고 들기름으로 볶은 나물파스타. 김경빈 기자

곤드레나물·시래기·고사리·버섯 넣고 들기름으로 볶은 나물파스타. 김경빈 기자

전국에 특이하고 매력적인 농산물이 많았다. 소비자를 만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농장주마다 판로를 잘 몰라 팔아 달라는 부탁을 많이 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겠다는 다짐과 방법을 구상하는 여행이 됐다. 몇 가지 품목을 골라 서울 DDP, 공덕역, 영등포 등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농산물은 생물이라 시간의 벽이 완강했다. 신선도 때문에 발생하는 수요-공급의 엇박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팔리지 않고 남는 농산물을 가공하거나 음식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안 팔린 가래떡으로 떡볶이를 만들고, 과일과 채소를 주스나 잼으로 만들었다. 시장에서 잘 팔렸다. 시식한 아기가 맛있게 먹으면 엄마들이 사가고, 언제 또 살 수 있냐 묻고 했다. 한자리에 있는 점포가 아니라 약속이 어려웠다. 전용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식당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때 춘천 육림고개 시장의 빈 점포 인테리어를 새로 해주고 창업하는 청년들 입점을 권유하는 사업과 인연이 닿았다. 2016년 11월 11일 ‘어쩌다농부’ 본점을 개업했다. 이날은 농업인의 날이고 젓가락 데이, 가래떡 데이다. “땅에서부터 시작하는 요리”라는 자신들의 캐치프레이즈에 맞춰 택일을 했다. 이웃에는 가래떡을 돌려 개업 인사를 했다.

텃밭을 모티브로 구성한 텃밭소보로. 김경빈 기자

텃밭을 모티브로 구성한 텃밭소보로. 김경빈 기자

아무런 경험도 없이 음식점 사업에 도전하는 그들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다. “좋은 땅, 좋은 농부, 좋은 요리사가 있으면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람직한 생산과 소비를 연결한다는 초심대로 “농사를 짓고, 농부를 만나고, 요리”하면서 시작했다. 직접 재배하고, 지역 생산물을 최대한 사용하고, 메뉴를 스스로 개발해 요리한다. 다만, 최근에는 음식점 사업이 커져서 농사 규모를 많이 줄였다.

요리는 함께 하지만 팀 막내인 노씨가 최고책임자다. 타고난 솜씨에 책과 동영상을 보면서 익히고 실험해 메뉴를 개발한다. 필요한 분야 요리 교실이 열리면 가끔 찾아가 수강도 한다. 전문가 도움도 일부 받았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한국형 파스타 레시피는 이탈리아 유학 후 돌아와 국산 재료를 활용한 이탈리아 요리로 화제를 모았던 박찬일 작가 겸 요리사가 손을 봐줬다.

명장의 명란과 청년농부 들기름으로 맛을 낸 명란들기름파스타. 김경빈 기자

명장의 명란과 청년농부 들기름으로 맛을 낸 명란들기름파스타. 김경빈 기자

서울 상륙작전에는 6가지 정예 메뉴가 출병했다. ①농부네한그릇텃밭 ②농부네소보로텃밭 ③시금치두부카레 ④닭갈비크림카레 ⑤명란들기름파스타 ⑥농부네나물파스타 등을 취재하면서 모두 시식하고 내용을 살폈다. 참으로 꾀가 많은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 재료들은 모두 사전 조리가 돼 있다. 주문에 맞춰 준비한 재료를 그릇에 담고 소스를 곁들이거나 가열해 살짝 볶는 정도만 더하면 요리가 완성된다. 전문 요리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최적화한 시스템이다.

한그릇텃밭은 텃밭을 모티브로 개발한 간장 소스 비건 비빔밥이다. 먹기 좋게 자른 5가지 쌈 채소, 적양배추 채, 병아리콩, 모둠 해초, 토마토, 새송이버섯을 밥과 어울려 담고 잘게 잘라 튀긴 양파와 으깨 볶은 국내산 두부를 덮어 낸다.

박찬일 요리사 등 전문가 도움받기도

시금치두부카레도 비건 음식이다. 시금치 페이스트가 들어간 카레와 밥에 으깨서 볶은 국산 두부와 튀긴 양파를 덮어준다. 카레는 오래 끓인 양파를 베이스로 한다. 닭갈비크림카레는 춘천 닭갈비를 카레에 적용했다. 오래 끓인 양파에 닭갈비와 고추장을 넣어 완성한 카레를 밥에 얹어 낸다. 밥은 아버지의 철원 오대쌀과 귀리, 현미를 섞어 지었다. 흰 크림을 얹고 튀긴 양파를 뿌린 다음 다진 대파를 소복하게 올려준다. 고추장이 들어가 약간 맵다. 고구마 두 조각도 올려주는데, 춘천 닭갈비에 들어가는 고구마를 참고했다. 매운 입을 달래주는 작용도 한다.

명란들기름파스타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건면, 강원도 화천의 여성 청년 농부가 생산한 ‘너래안 들기름’과 수산제조부문 대한민국 명장(2011년 고용노동부 지정)이 제조한 ‘장석준 명란’이 주재료다. 김 가루와 쪽파 거칠게 빻은 고춧가루가 고명으로 올라간다. 나물 파스타는 강원도에서 자주 먹는 곤드레·시래기·고사리와 버섯(표고·만가닥)을 넣고 들기름으로 완성한 비건 파스타이다. 이 파스타의 성공을 바탕으로 메뉴를 확충해 지난해 2월 춘천에 ‘시골파스타’라는 분점을 내기도 했다.

음식들은 한국 재료에 범세계 음식문화의 옷을 입힌 퓨전이다. 손님들 반응은 세대 차가 뚜렷하다. 젊은이들은 “이색적이고 재미있다”고 한다. 중년 이상은 “이게 뭐야, 어렵다”고 한다. 음식의 미래 지표는 결국 젊은이들 입맛이다. “더 나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우리가 소비를 일으키고, 그 모델이 성공해서 널리 퍼지기를 기대한다”는 세 청년의 꿈은 그래서 희망적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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