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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앞세워 ‘집 싸움’ 나선 시진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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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주석 전인대 폐막 연설. 로이터=연합뉴스

시진핑 주석 전인대 폐막 연설. 로이터=연합뉴스

중국의 전략적 외교 행위 패턴은 흔히 바둑에 비유된다. 바둑은 사방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작은 집 싸움들에서 하나씩 고지를 점령해 나가며 전체적인 ‘국면’을 유리하게 조성하는 게임이다. 결국엔 계가(計家)를 통해 어느 쪽이 더 ‘유리함’을 쌓아왔는지 따져보거나 때로는 상대방의 자발적 항복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헨리 키신저는 “중국 정치인들은 모 아니면 도 식의 단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다.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상대적인 이익을 끈기 있게 쌓아나가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체스처럼 모든 말들이 왕이라는 하나의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기동하는 서구적 사고방식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세계라는 바둑판(혹은 체스판)을 놓고 미국과 대국을 시작한 중국이 시진핑 3기 출범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집 싸움’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 10일 발표된 사우디아라비아-이란 관계 정상화 발표는 중국 외교력의 획을 긋는 이벤트였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맹주국 격인 두 나라는 격렬해진 종파 분쟁으로 2016년 단교한 지 7년 만에 상호 대사관을 다시 열기로 합의했다. 합의 장소가 시진핑의 국가주석 3연임이 확정된 중국 베이징이었다. 양국은 중국의 주재로 4일간의 협상 끝에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AP통신은 “중동에서 미국이 서서히 발을 빼는 것으로 걸프 국가들이 인식하는 가운데 중국의 중요한 외교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두 나라의 화해로 종파 갈등을 벌여 온 중동 6개국에도 화해 무드가 조성될 것으로 중국 매체들은 전망했다.

중국의 행마(行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 주석이 1년째 전쟁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직접 접촉할 계획을 밝힌 것이다. 중국 당국은 지난달 24일 개전 1주년 때 ‘정치적 해결에 대한 입장’을 내고 직접 대화 조기 재개를 촉구했다. 시진핑은 이르면 다음 주 러시아로 가서 푸틴과 회담할 예정이며, 젤렌스키와는 화상 회담을 계획하고 있다. 시는 개전 이후 푸틴과 4차례 회담을 했지만 젤렌스키와의 접촉은 없었다. 확고한 친러 입장을 보여온 중국이 우크라이나를 만족시킬 카드를 보여줄지 관건이지만 평화 메시지와 중재 노력만으로도 국제적으로 긍정적 이미지를 쌓을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중국의 러-우 중재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적 외교의 한계를 지적하고 중국적 대안을 부각하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추이헝 화둥사범대 러시아연구센터 연구원은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에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의 본질은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팽창과 러시아의 안보 및 세력균형 요구의 지정학적 대립”이며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대리인으로서 러시아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글로벌타임스는 “중국은 글로벌 안보 구상의 정신에 따라 중국식으로 할 것”이라며 “단순히 한 쪽이 다른 쪽을 압박하는 것을 돕기보다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지만 평화라는 명분을 앞세운 중국의 행보에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분위기다. 시진핑과 젤렌스키의 회담 계획에 대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시 주석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접촉하는 것을 권장해 왔다”고 무미건조하게 언급했다. 블룸버그는 “시 주석의 이런 제스처가 러시아와 중국을 한통속으로 만들어 국제무대에서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노력을 약화할 것”이라고 평했다.

미국은 핵 개발 문제 등으로 이란을 적성국으로 취급하고 있다. 또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를 반체제 언론인 살해 배후로 지목하며 사우디를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해 양국 관계가 급랭했고, 중동에서 영향력이 약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이 이런 빈틈을 파고든 것이다. 이 때문에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임명되지 않고 있는 주사우디 대사를 빨리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럼에도 미국과 사우디가 전통적으로 불가분의 군사동맹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영향력이 미국을 넘볼 순 없을 것이란 평가가 많다.

시진핑은 세 번째 임기 출범 이후 광폭 외교 행보에 시동을 걸었다.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당 총서기에 오른 직후인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의 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했고 중국이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올해 중엔 중국·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중앙아시아는 정치적 후견국인 러시아가 버티고 있고 미국이 여러 곳에 군사기지를 세우기도 했으며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역이어서 중국이 영향력을 보다 키울 필요가 있다. 제3차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도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시 주석의 요즘 행보는 첫 임기를 시작한 2013년을 보는 듯하다. 그해 시진핑은 미국을 방문해 태평양을 반분(半分)하자는 ‘신형대국관계’를 주장했다. 한 해에만 20곳 이상의 주변국과 정상급 회담을 개최했고, 한국과 미얀마, 파키스탄, 아제르바이젠,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동반자관계를 격상했다. 2014년엔 한국과 몽골에 순방이 아닌 단독 방문을 감행해 한·중 FTA와 중·몽 관계 격상조약을 체결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외교 업적을 쌓아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과거 외교의 초점은 미국과의 강대국 외교와 주변국 외교, 아프리카 등 저발전국 외교에 맞춰졌다. 지금은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핵심 지역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충형 차이나랩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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