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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자연의 이치는 공생…활엽수 남벌이 화마 키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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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22년 울진 산불과 인간경영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한국인에게 친숙한 나무를 꼽으라면 단연 소나무다. 애국가에도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으로 등장할 뿐 아니라 소나무의 ‘솔’은 으뜸이란 의미여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나무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소나무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푼다. 줄기를 베어 가구나 관을 짜고, 솔잎은 송편을 만들 때 사용한다. 피 즙은 과거 봄철 보릿고개 때 배고픔을 해결해 줬다. 송진은 염증을 빨리 곪게 해서 고름을 빨아내므로 고약을 만드는 데 쓴다. 또 소나무는 베어진 뒤 7~8년이 지나면 뿌리에서 외생근균이 자라나 버섯이 되는데, 이는 중요한 약재다.

소나무 중에서 최고로 치는 건 금강송이다. 금강(金剛)은 최고라는 말이어서 돌 중에 최고는 금강석이고, 산 중에 최고는 금강산이다. 『금강경』도 불교 최고 경전이란 말이다. 그런데 울진 일대 소나무가 금강송으로 불린 건 비교적 최근이다. 2000년쯤 이 지역 산림청장으로 부임한 분이 이곳 소나무를 금강송으로 명명한 뒤부터다. 그 전에는 황장목(黃腸木)으로 불렸는데 줄기 ‘내부(腸)’가 송진으로 ‘누런(黃)’색을 띠어서다. 또 춘양목으로 알려진 건 벌목된 금강송이 춘양(春陽)으로 모여들어서다. 참고로 ‘억지 춘양’은 철길이 똑바로 연결되지 않고 춘양으로 볼록하게 돌아가 생겨난 말이다.

한국 최고의 금강송 군락지 명성
수분 많은 활엽수 베어내 큰 피해

여러 나무가 함께 사는 게 자연계
사회도, 기업도 다양한 사람 필요

시비·우열 부인한 장자의 ‘화리론’
경영의 요체는 최적의 인력 배치

일반 소나무보다 송진 8배 많아

경북 울진 금강송 군락지에 석양이 지고 있다. 지난해 울진 산불에서도 금강송 군락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경북 울진 금강송 군락지에 석양이 지고 있다. 지난해 울진 산불에서도 금강송 군락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금강송은 일반 소나무와 달리 송진이 유난히 많다. 금강송 군락지인 소광리를 방문했을 때 단면으로 자른 금강송과 일반 소나무가 함께 전시돼 있었는데, 금강송은 송진이 줄기의 80%를 차지하는 데 반해 일반 소나무는 10% 정도였다. 이런 송진이 큰 막을 형성해 금강송이 단단하다. 또 이 송진 막으로 금강송이 잘 휘지 않을뿐더러 벌레가 나무 안으로 기어들지 못해 균열도 잘되지 않는다. 옛날에는 궁궐 같은 주요 건물 외에는 금강송을 사용할 수 없어 함부로 베서는 안 될 금송(禁松)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판옥선이 일본군 배와 충돌해 부술 수 있었던 것도 금강송으로 만든 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울진 금강송. [사진 박은영]

하늘 높이 솟아 오른 울진 금강송. [사진 박은영]

금강송이 아무리 소중해도 주위 다른 나무들을 베면 금강송에 오히려 해가 된다. 산불이 나면 그 해는 치명적인데 이런 치명적인 해는 지난해 이맘때쯤 있었던 울진산불에 의해 여실히 증명되었다. 산불이 9일간 계속되면서 5500만평을 태웠는데, 서울 여의도 면적의 63배 크기다. 규모에서 역대 최고였을 뿐 아니라 피해도 다른 산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울진산불 피해가 커진 원인이 최근 밝혀졌다. 산불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강송면이 있을 정도로 울진에는 좋은 소나무가 많다.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또 소나무에 기생하는 송이버섯을 더 많이 채취하기 위해 옆의 활엽수를 베었는데 이것이 산불 피해를 크게 한 원인이 되었다. 활엽수 잎은 수분을 머금고 있어 산불이 나면 자연스럽게 소방 역할을 한다. 이런 활엽수를 베었으니 자연이 담당하는 소방 기능을 인간 스스로 없앴다. 게다가 활엽수가 잘려나간 곳은 불의 통로가 돼 불이 번지는 데 한몫했다. 자연의 이치를 외면한 인간 행동이 이런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한 거다.

‘천도=인도=치도’ 동양의 지혜

지난해 봄 화마가 할퀴고 간 울진 산악지대. [사진 정종훈]

지난해 봄 화마가 할퀴고 간 울진 산악지대. [사진 정종훈]

그렇다면 울진산불 피해가 커진 원인을 동아시아 전통적 학문관을 소홀히 한 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동아시아 학문관은 자연의 이치인 천도(天道)에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도(人道)와 사회가 나아가는 치도(治道)를 제시한다. 인도와 치도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자연의 이치를 소중히 여기는 동아시아 학문은 서구 학문의 엄격한 과학성과 비교된다. 그래서 인도에 해당하는 서구 인문과학과 치도에 해당하는 서구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천도에 해당하는 서구 자연과학조차 자연의 이치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소나무 옆의 활엽수를 제거한 것도 자연의 이치를 소홀히 한 일에 속한다. 전문가들은 나름 ‘합리적’ 판단이라고 여겨서 활엽수를 제거했는지 모르지만, 산불이 나면서 이런 판단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소나무가 사람의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활엽수와 동거하도록 놔두는 게 동아시아 학문이 말하는 지혜이다. 또 계절에는 사시사철이 있고 하루에는 밤낮이 있는 것처럼 산에는 온갖 나무가 있어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이런 동아시아적 지혜를 소홀히 하고 자연의 이치를 무시한 결과 울진산불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잭 웰치는 과연 경영의 우상인가

금강송과 일반 소나무(아래 사진) 줄기 단면. 짙은 부분이 송진인데 금강송이 일반 소나무보다 송진 함량이 8배 가까이 많다. [사진 박은영]

금강송과 일반 소나무(아래 사진) 줄기 단면. 짙은 부분이 송진인데 금강송이 일반 소나무보다 송진 함량이 8배 가까이 많다. [사진 박은영]

금강송(위)과 일반 소나무 줄기 단면. 짙은 부분이 송진인데 금강송이 일반 소나무보다 송진 함량이 8배 가까이 많다. [사진 박은영]

금강송(위)과 일반 소나무 줄기 단면. 짙은 부분이 송진인데 금강송이 일반 소나무보다 송진 함량이 8배 가까이 많다. [사진 박은영]

이런 잘못된 판단은 자연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세계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 제너럴 일렉트릭(GE) 사의 최고경영자였던 잭 웰치(Jack Welch)는 인사관리를 잘해 한때 전 세계 경영인의 우상으로 등장한 바 있다. 그가 이런 좋은 평판을 얻은 건 역설적으로 그의 ‘잔인한’ 인사관리 철학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인사고과를 명확히 해 무능력한 사람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에 따라 모든 직원을 세 등급으로 나눈 뒤 하위 10% 직원을 과감히 해고 조치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른데 이를 인위적 기준으로 평가하면 자칫 요령 좋은 사람만 살아남는다. 그런데도 웰치는 꽃밭에서 잡초를 걸러내는 일에 비유했으니 자연의 이치를 외면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이와 반대되는 논리도 있다. 개미는 부지런하다고 알려져 있어도 일정 정도 개미는 늘 게으르다. 이런 사실은 게으른 개미를 제거해도 남은 개미가 모두 부지런하지 않다는 실험 결과로 입증된다. 그렇다면 웰치의 경영철학하에서 애꿎은 직원만 희생된 건 아니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웰치가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난 뒤 GE의 경영상태가 예전만 하지 못한 채 계속되어서다. 이런 우울한 결과는 웰치의 경영철학이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효과에만 집착한 나머지 조직의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깨뜨려서가 아닐까.

볼록하게 돌아간 경북 봉화 춘양면 중앙선 철로

볼록하게 돌아간 경북 봉화 춘양면 중앙선 철로

산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가 있듯이 세상에도 온갖 사람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좋은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건 희망 사항일 뿐 서로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게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그런데도 서구 형이상학은 이런 희망이 세상에서 구현되기를 오랫동안 꿈꿔 왔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 철학이 ‘이데아’를 도입하고, 중세철학이 ‘신’을 요청하고, 근대철학이 ‘이성’을 받든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 결과 서구는 이데아, 신, 합리성에 의해서 인간세계에 선(善)의 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랐다. 이런 바람은 산에는 소나무만 있어야 하고 기업에는 유능한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과 이데아보다 조화와 형평

20세기 후반 들어 이런 바람은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깨졌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 데리다(J Derrida)가 이런 철학적 조류에 앞장섰는데 그는 2000년이란 오랜 역사를 지닌 서구 형이상학을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신과 같은 완벽한 존재가 쓴 ‘성선(性善)의 책’이 아니라, ‘선악(善惡)이 함께 써 내려간 텍스트’이다. 이런 텍스트는 선이라는 씨줄과 악이라는 날줄이 교차하면서 짠 직물과 같다. 이런 직물과 같은 세상에선 이데아, 신, 합리성과 같은 절대적 중심이 없는데도 조화와 평형을 기막히게 이룬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런 원리로 운영되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자연계에선 어느 게 좋고 어느 게 나쁘지 않다. 소나무가 좋고 활엽수가 나쁘면 그건 인간의 관점이다. 마찬가지로 유능한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건 경영인의 관점이다. 그러니 훌륭한 경영인이 되려면 구성원을 해고하기에 앞서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자연계가 이렇게 운영되므로 전체로서 조화와 평형을 잘 유지한다.

장자는 자연계의 이런 소프트웨어를 가리켜서 화리(和理)라고 말한다. 화리는 자연스러운 알맞음과 적당함을 추구하므로 최선과 최고를 위해 시비와 우열을 인위적으로 가리는 합리(合理)보다 우선한다. 그렇다면 울진산불에서 배워야 할 교훈도 이런 화리의 소중함이지 않을까.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