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그 가족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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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은 한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기숙사를 개조한 전시 공간이다. 30년 된 시멘트벽과 목재문을 재활용한 전시장에는 지역경제를 견인했던 노동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공간에서 최근 민진영·배지인·임윤경을 비롯한 6인의 젊은 작가가 가족을 주제로 한 ‘K의 이름’전을 열고 있다.(4월 1일까지) 작가는 30대에서 40대 초반이며, 그 부모들은 1950년대에 출생해 1980~90년대 경제성장을 이끌었으나, 두 차례 금융위기의 여파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겪어야 했던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다. 6인의 작가들은 거대한 가족담론이나 수치화한 통계로는 가늠되지 않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가족의 이야기를 25점의 유화·설치·영상작품을 통해 들려준다.

젊은 작가 6인의 ‘K의 이름’전
베이비 붐 세대의 부모들 다뤄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끝없이 떠도는 이 시대 사람들

황예지, PAPA, 2022, 싱글채널 비디오, 40분. [사진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황예지, PAPA, 2022, 싱글채널 비디오, 40분. [사진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현세진(36)은 전시장 바닥에 흰색 가루로 두 개의 방 평면도를 중첩해서 그렸다. 두 개의 방은 이혼한 엄마 집과 아빠 집에 있는 ‘나의 방’이다. 부모의 이혼에 따라 태어나면서 속했던 가정이란 영역에서 추방당한 나는 두 개의 방을 오가며 산다. 두 방의 중첩된 부분은 엄마와 아빠가 공존하는-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내 마음속 공간이자, 둘을 이어주는 혈육으로서의 나 자신이기도 하다. 하나이면서 따로 떨어진 두 공간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넘나듦으로써 나는 그 경계를 지우고 다시 그린다. 이는 이혼한 부모와 새롭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을 다시 규정하고, 이혼 부부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익숙해지기 위한 아프고도 혼란스러운 내면의 과정인 것이다.

남다른 가족사를 지닌 사진작가 황예지(30)는 자신의 질병을 가족들에게 숨긴 채 편지 한 통만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엄마, 그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6살 위 언니 이야기를 사진에 담아왔다. 이번에 출품된 ‘PAPA(2022)’는 어릴 적 원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작가의 아빠를 인터뷰한 기록영상이다. 작가는 아빠를 가족 구성원이 아닌, 굴곡진 현대사를 살아낸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질문을 던진다. 무역회사 사환으로 시작해 상업고 야간반을 졸업하고, 은행에 근무하다 급성백혈병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었던 숨 막히는 순간을 아빠는 담담하게 얘기한다. 노동조합을 조직해 위원장으로서 직장 민주화를 이끌었지만 동료의 배신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사람, IMF 외환위기로 정리해고 대상이 됐지만 지금은 범일운수 마을버스 기사로 일하며 자신에 주어진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치열했던 생애를 작가는 흔들림 없이 기록한다.

목사의 아들로서 교회 문화 속에서 성장한 맹성규(33)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이 몸담았던 한국교회가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집단주의가 투영된 공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전시에 출품된 ‘세계로 트레블 어댑터(2021)’는 외국 여행할 때 필요한, 실제 사용이 가능한 어댑터(7×9×7.7㎝)로, 그의 아버지가 청주에 세운 ‘세계로 교회’에서 제목을 빌렸다. 각 나라에 맞게 여러 형태의 단자들을 결합한 이 여행용 어댑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트랜스포머가 변신하듯 내장된 단자들을 하나씩 펼쳐내야 한다. 펼치는 행위는 ‘세계로’라는 종교적 슬로건에 숨어 있는 팽창주의적 자본주의 논리를 해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작가는 어댑터를 해체하는 영상의 자막에 ‘이탈리아 발덴시아 교회는 동성 결혼 서약을 축복했다’ ‘홍콩 기독교 지도자들은 앞줄에 서서 반정부 시위대를 보호했다’ ‘영국 국교회는 모슬렘 혐오를 없애기 위해 크리스천-모슬렘 포럼을 세웠다’ 같이 종교적 배타성에서 벗어나 탈권위주의로 거듭나는 세계 교회의 동향을 삽입함으로써 ‘세계로’의 진정한 종교적 의미를 제시한다.

젊은 세대에 가족이란 자신을 규정하는 존재론적 근원이지만 동시에, 언제라도 해체되어 사라질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것이다.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진 이들은 자신을 위로해 줄 안식처로서 가족을 원하지만 신기루처럼 조각나 버린 가족은 오히려 이들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가족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서성이는 오늘날 가족 성원의 모습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주변을 부유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城)』 속의 주인공 ‘K’와 닮아있다. 오늘날 수많은 ‘K’들을 대신해 젊은 작가들은 자신의 상처를 과감히 드러내고 위기에 처한 가족들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인지 모른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