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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 입찰, 17년 만에 경쟁이라지만...실제론 '속 빈 강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슈분석]

현대로템이 제작한 EMU-320 고속열차. 연합뉴스

현대로템이 제작한 EMU-320 고속열차. 연합뉴스

 최근 국내에서 진행되는 고속열차 입찰에서 17년 만에 경쟁구도가 다시 이뤄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코레일이 발주한 동력분산식 고속열차(EMU-320) 입찰에서 현대차 계열의 현대로템에 맞서 중소 철도차량제작업체인 우진산전이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앞서 현대로템만 입찰에 참여해 재공고에 나섰던 코레일은 지난 14일 “우진산전이 응찰에 나서 경쟁입찰이 성립됐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주된 물량은 17편성(136량)으로 예정가만 7000억원에 달하며 1량당 가격은 51억원 수준이다.

 코레일은 오는 20일까지 두 업체를 대상으로 기술평가와 가격개찰을 통해 낙찰자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렇게만 보면 지난 2005년 'KTX-산천' 입찰 이후 사실상 현대로템이 독점해온 고속열차 시장에도 드디어 경쟁이 이뤄지게 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피면 '경쟁'이란 단어를 붙이기도 무색할 지경이다. 철도업계에선 “경쟁은 고사하고 아예 게임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우진산전·탈고 컨소시엄 무산  

 우진산전이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스페인의 고속열차 제작사인 '탈고'와 컨소시엄을 구성하지 않고 단독으로 응찰했기 때문이다. 탈고는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대신 주요 부품과 관련 기술만 제공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진산전 로고. [홈페이지 캡처]

우진산전 로고. [홈페이지 캡처]

 이렇게 되면 우진산전은 시속 300㎞대의 고속열차는 고사하고 시속 200㎞대로 달리는 준고속열차도 만든 경험이 전혀 없는 탓에 기술평가(실적항목)에서 점수를 못 받는다.

 9점 만점의 실적항목에선 ▶영업 최고속도 시속 320㎞ 이상의 동력분산식 철도차량 제작 납품(동등 이상 물품) ▶영업 최고속도 시속 320㎞ 이상의 동력집중식 철도차량 또는 동력분산식 고속전기철도차량 제작 납품(유사 물품)만 해당한다.

 동력분산식은 맨 앞의 동력차가 뒤에 연결된 객차를 끌고 달리는 동력집중식(KTX, KTX-산천)과 달리 별도의 동력차 없이 객차 밑에 모터를 분산 배치해 주행하며 가ㆍ감속이 뛰어나다.

 동등 이상 물품이면 최대 9점, 유사물품으로 인정되면 최대 4.5점을 받는다. 현대로템은 동등 이상 물품 납품 실적은 없지만 'KTX-이음(EMU-260)'을 납품한 덕에 4.5점까지 얻을 수 있다.

 우진, 고속철 실적 없어 점수 못따 

 반면 우진산전은 아무 실적이 없어서 기본점수만 받는다. 사실상 '0'점인 셈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다른 항목에서 점수를 잘 받아서 기술평가 통과기준(100점 만점에 85점 이상)을 달성하면 가격 경쟁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실적점수없이 기술평가를 통과하려면 기술력, 사업수행능력, 부품 국산화율 등 다른 항목에서 정말 뛰어나야만 하는데 중소업체인 우진산전이 그 수준에 도달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게다가 우진산전은 서울메트로 등에서 수주한 전동차를 제때 납품하지 못해 상당액의 지체상금까지 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적점수를 못 받고 다른 점수로 보충하기에는 여러모로 힘들다는 것이다.

스페인이 탈고가 제작한 고속열차 '탈고 350'. [출처 위키백과]

스페인이 탈고가 제작한 고속열차 '탈고 350'. [출처 위키백과]

 우진산전 관계자에 따르면 탈고와의 컨소시엄이 무산된 건 차량 가격 때문이라고 한다. 코레일의 구매예정가격이 탈고가 기대하는 수준보다 낮아 굳이 투자와 각종 책임 부담을 안아야만 하는 컨소시엄에 참여하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우진산전은 지난해 탈고와 손잡고 국내 고속열차 시장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우진산전 단독으로는 어렵지만, 탈고와 컨소시엄을 구성하면 각종 평가도 통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탈고와 제대로 합의한 것 맞나" 비판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서 현대로템과 관련 부품회사들은 “무분별하게 외국업체의 참여를 허용하면 국내 철도차량업계의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반면 “현대로템의 오랜 독점을 깨고 경쟁을 통해서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찬성도 많았다.

 찬반이 충돌하면서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고, 결국 코레일은 이례적으로 감사원에 입찰조건에 대한 사전컨설팅까지 요청했다. 오랜 진통 끝에 우진산전과 탈고 컨소시엄도 입찰에 참여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여러모로 경쟁의 경쟁력을 인정한 셈이었다.

코레일의 호남철도차량정비단에서 해빙기 핵심부품 점검을 마친 고속열차들. 뉴스1

코레일의 호남철도차량정비단에서 해빙기 핵심부품 점검을 마친 고속열차들. 뉴스1

 그런데 가격 차이 때문에 컨소시엄이 무산된 것으로 전해지면서 우진산전에 대한 실망감과 비판이 쏟아진다. 한 철도운영회사 관계자는 “국내 고속철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다 알려진 사실인데 이제 와서 가격 때문에 컨소시엄이 무산됐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며 “애초 탈고와의 컨소시엄 논의가 제대로 되긴 한 것인지 의아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우진산전 관계자는 “탈고가 수서고속열차(SR)가 공고한 EMU-320 14편성의 입찰에는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SR은 최근 고속열차 14편성(112량)과 차량정비를 한데 묶어서 입찰공고를 냈다. 전체 예정가만 1조원이 넘는다.

 그러나 차량가격만 따지면 1량당 47억원으로 코레일보다 오히려 적게 책정됐다. 게다가 차량정비를 하려면 대규모 시설투자가 필요하다. 고속열차 경험이 전무한 우진산전으로선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찰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렇게 보면 결국 우진산전이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섣불리 고속열차 시장에 뛰어들겠다고 나섰다가 괜한 분란만 일으켰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진산전이 앞으로 이어질 고속철 입찰에선 다른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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