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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차이나타운과 인삼 교역

중앙일보

입력

본국에서 거리가 먼 차이나타운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려인삼이나 그 대용품을 구하려고 애썼다. 사진 셔터스톡

본국에서 거리가 먼 차이나타운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려인삼이나 그 대용품을 구하려고 애썼다. 사진 셔터스톡

차이나타운 이야기를 할 때 고려인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인삼을 선호한 중국인이 나라 밖으로 나가 차이나타운에 정착해도 소비 풍습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국에서 거리가 먼 차이나타운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려인삼이나 그 대용품을 구하려고 애썼다.

고려인삼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조선이 중국에 수출한 대표적인 상품이었다. 고려인삼의 생산은 조선이, 다량 소비는 중국에서 하는 방식은 이미 그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려인삼은 동아시아에서 국제적으로 가치가 인정된 상품으로, 사실상 경화 같은 역할을 했다. 사신이나 상인이 중국에 갈 때 현지 화폐를 준비해 갈 필요 없이(환전도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인삼만 가져가면 중국 어디에서건 화폐처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인삼이 중국에서 이처럼 인기를 끈 것은 약효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재배인삼은 오랫동안 한반도의 주요 산물이었지만, 야생삼은 한반도나 백두산 근처는 물론 다양한 곳에서 자생한다. 다만 약효에서 고려인삼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 과학적인 연구 결과 사포닌 같은 유효 성분의 함량이나 종류도 서로 다르다. 중국에는 관동삼(關東蔘)이, 일본에서는 죽절인삼(竹節人蔘)이 있었다. 효능은 물론 향기와 맛도 고려인삼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청나라 말기인 19세기에 북미 지역에 철도 부설 노동자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미국 로키산맥 지역에 야생삼, 즉 산삼이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쿨리(苦力)’로 불리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이 야생삼을 먹으며 활기를 찾으려 했다.

19세기 중국인 노동자들이 인삼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것을 본 미국인 농부 중 일부는 이들에게 인삼을 공급하기 위해 농업지대인 중서부에서 인삼 재배를 시작했다. 바로 화기삼(華旗蔘)으로 불리는 미국산 재배인삼이다. 하지만 이 역시 고려인삼의 효력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중국 본토에서 미국에서 화기삼을 들여와 재배해 해외 진출을 시도한다는 소식이 있지만 별 인기는 없다. 약효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가 운영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1980년대 이후 수시로 ‘로키산맥 산삼’을 홍보해왔다. 단순한 토픽용이 아니라 마케팅 목적도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로키산맥에서 나는 것은 야생삼인데도 한국의 고려인삼 재배삼보다 효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생약학자들의 이야기다.

게다가 조선에는 비장의 첨단 고려인삼 제품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수삼을 수증기로 쪄서 건조한 홍삼이 바로 그것이다. 홍삼은 재배한 신선 인삼인 수삼이나, 껍질을 벗겨 말린 백삼보다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찌고 말리는 과정에서 효과도 강해져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인삼을 쪄서 말린 것이 있다는 1000년 전의 기록이 있으니 홍삼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전으로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1809년 프랑스에서 개발한 병조림이 군대를 위한 전쟁물자라면, 홍삼은 중국 등과의 교역을 위해 개발된 평화와 소통의 교역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관성이 좋은 홍삼을 중심으로 한 조선과 중국 명나라, 청나라 간의 고려인삼 교역은 공무역(公貿易)과 사무역(私貿易)의 두 가지 형태로 이뤄졌다. 공무역은 조선 사신이 중국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황제가 답례로 하사하는 선물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중국은 체면을 생각해 받은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오죽했으면 중국에서 재정 사정이 나빠지면 류큐 왕국(琉球‧유지금의 일본 오키나와) 등 주변국 사신의 왕래 횟수를 줄여 지출을 줄이려고 했을까.

하지만 실제론 중간 과정에서 중국 관리가 떼먹거나 내시에게 바치는 뇌물로 전용되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조선에서 실제로 받아오는 것은 보내는 것보다는 많았다고 한다. 물가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관원들도 은덩이 등을 들고 가서 서적이나 서화, 또는 상사나 일가 어른, 가족‧친지에서 선물할 잡화를 사왔다. 조침문(弔針文)에 나오는 부러진 바늘도 친척이 사신으로 갔다 중국에서 사왔다고 표현된다. 남은 일부를 팔면 상당한 차액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사무역은 사신을 따라가서 허드렛일을 맡는 수행원 자격(관원은 아니었다)으로 베이징에 간 상인들이 현지 중국인 상인에게 고려인삼을 넘겨주고 은이나 다른 상품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문제는 상인들이 사신의 일정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사신이 귀국을 하면 꼼짝없이 함께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아는 중국 사신들은 조선 사신의 귀국 기일이 다가오면 담합을 통해 상인들의 고려인삼의 구매를 미루면서 헐값에 넘기도록 유도하는 일도 왕왕 있었던 걸로 전해진다.

청나라의 선종 도광제(재위 1820~1850) 시절인 1821년에도 중국 상인들의 담합이 있었다. 애가 탄 조선 상인들이 한숨만 쉬고 있었는데, 의주 출신의 임상옥(1779~1855)이 헐값에 파느니 모두 불태우겠다며 인삼을 모아서 쌓아놓았다. 당시 고려인삼은 중국 전역에서 수요가 있었으며, 벼슬아치들이 윗선에 바치는 주요 선물에서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사신은 매년 오는 게 아니어서 한번 왔을 때 상당한 물량을 구해놓지 않으면 중국 상인들도 장사를 할 수 없게 된다. 임상옥의 기세에 밀려 중국 상인들은 먼저 손을 들었으며 조선의 고려인삼 상인들은 헐값은커녕 평소의 몇 배나 되는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담합이 벌어진 청나라는 이미 국력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도광제 시절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1840년)에 패배해 홍콩을 영국에 떼어주고 상하이(上海)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하는 굴욕적인 난징조약(1842)을 맺었다.

조선 상인이 청에 홍삼을 수출하는 길이 공식적으로 열린 것은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 23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맺어지면서다. 청나라 상인이 조선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면서 장사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양국 어선이 서로 상대방 바다에 나가 조업할 수 있도록 했다. 조약의 제6조는 ‘선 상인이 청에 홍삼을 수출하는 것을 허가하고 관세는 가격의 100분의 15로 하도록’이라고 규정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본격적인 민간무역이 시작됐으며, 1883년 11월에는 인천과 상하이를 잇는 정기항로가 개설됐다.

중국의 무역도시이자 국제도시인 상하이(上海)는 고려인삼이 중국 밖의 차이나타운을 비롯한 국제 시장으로 진출하는 중간기지 역할을 했다. 고려인삼을 들고 상하이로 향한 조선인 동포들은 약재상이나 한약방을 차려 이를 팔았을 뿐 아니라 이곳을 거쳐 홍콩과 싱가포르까지 진출했다. 유학이나 독립운동, 또는 일자리를 찾아 상하이를 찾은 조선인들은 대개 인삼을 한 보따리 들고 들어갔다. 학자금이나 생활비, 여비용으로 화폐 역할을 하는 고려인삼을 들고 간 것이다. 무게당 가치가 높아 화폐 못지않은 효용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인삼 판매는 상하이를 비롯한 재중한인들의 경제활동을 위한 주요 상품이었다. 조선인들은 고려 인삼을 들고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내륙은 물론 화교들이 살던 영국령 말레이(지금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나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했다. 그곳에는 차이나타운이 있었고, 거리 문제 등으로 중국보다 고려인삼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일부 조선인은 미국에 자리 잡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인삼 판매 구역을 놓고 서로 상투를 잡고 싸우는 한인들을 말리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인삼은 그 시대 동북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미주까지 확산하며 국제적인 브랜드가 됐다. 통화 대용의 환금상품이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한인 인삼상인들이 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했다. 김규식 선생이 파리 강화회담이 열리는 파리로 떠난 자금을 모아준 교민도 이곳의 고려인삼 상인이 주축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해외무역을 주도한 고려인삼과 인삼상인은 독립운동의 경제적 발판이었다.

고려인삼의 경제적 효용을 알아챈 일제는 조선 통감부 시절(1906~1910)부과 총독부 시절(1910~1945)에 조선에서 홍삼을 전매했다. 일본기업 미쓰이(三井)만이 독점 판매할 수 있었고, 조선 상인은 보관성이 좋지 않은 수삼과 백삼만 거래할 수 있었다. 홍삼은 오늘날 반도체의 위상과 비슷한 국제 교역의 전략상품이었던 셈이다.

일제가 금지하고 단속하지 않았으면 더 많은 조선 상인들이 홍삼을 비롯한 고려인삼 제품을 앞세워 해외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남아시아와 미주 주요 도시의 차이나타운, 그리고 중국 주요 개항지에 세력을 형성하고 중국 무역상과 합종연횡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말이다.

채인택 국제 저널리스트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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