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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990건' 압수수색 전성시대…'선'넘는 수사, 무죄 빌미 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압수수색 전성시대①]

 수원지검은 지난달 22일~15일 수사관들을 경기도청에 파견해 상주시켰다. 쌍방울그룹과 경기도의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한 압수수색을 위해서다.

지난해 7월1일 김동연 지사 취임 후 경기도청이 검·경의 압수수색 대상이 된 건 13번째다. 대부분 전임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또는 이화영 전 평화부지사 관련 의혹 때문에 진행된 수사였다. 끝모르는 압수수색은 김 지사가 “민주국가가 아닌 검(檢)주국가”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배경이다.

취임 후 새로 들인 업무용 컴퓨터까지 압수수색 당한 것도 김 지사를 자극했다. 그는 지난 10일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에 나와 “경기도청에서 압수수색 당한 문건만 해도 6만6185건”이라면서 “2주 넘게 상주해서 아예 사무실을 내고 압수수색하는 사례를 본 일이 있나. 세계에 내놔도 결코 갱신될 수 없을 최고의 신기록”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4월4일 경기남부경찰청 수사관들이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청에서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 부인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 관련 압수수색을 마친 후 압수품을 옮기고 있다. 뉴스1

지난해 4월4일 경기남부경찰청 수사관들이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청에서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 부인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 관련 압수수색을 마친 후 압수품을 옮기고 있다. 뉴스1

지난해 압수수색 청구 건수는 39만6671건. 하루에 1000건이 넘는 압수수색 영장 청구서가 법원으로 향하는 셈이다. 이중 법원이 기각한 것은 3만5195건에 불과해 영장 발부율은 91.1%에 달한다. 최근 10년간 압수수색 영장 청구·발부 건수는 꾸준히 증가세다. 10만8992건 청구에 9만5123건이 발부됐던 2011년에 비해 네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달 들어서도 경찰 간부의 집(2일, 뇌물 수수 혐의), 게임 제작사(8일, 넥슨의 미공개 프로젝트 유출 의혹), 한국복합물류(13일, 이학영 민주당 의원 취업 청탁 의혹), 양대 노총 산하 노조 사무실(14일, 건설 불법행위), 국방부 청사(15일, ‘천공’의 관저 개입 의혹)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어졌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만 그렇다.

그래픽=신재민 기자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shin.jaemin@joongang.co.kr

압수수색 영장 청구·발부 건수가 는다는 것은 수사기관이 제몫을 다한 결과일 수 있지만, 양적 증가는 다양한 질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기업들은 위법을 예방하거나 자정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로펌의 법률자문을 받은 문건이 압수수색의 타깃이 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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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기업 법무실 관계자는 “리스크 관리를 위한 자문 과정에서 로펌과 주고받은 자료를 압수해 그걸 법정에서 유죄 증거로 써먹는 걸 봤다”고 말했다. 기업 형사 사건 경험이 많은 대형 로펌의 변호사는 “이제는 아예 로펌 자문 결과부터 노리는 게 수사트렌드”라며 “수사기관은 이 자료를 족집게 참고서 삼아 방향을 정하는 거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신라젠 경영진과 공모해 신라젠 신주인수권부사채 가장납입을 설계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DB금융투자 임원 이모씨 역시 압수된 변호사의 법률 검토 의견서가 결정적 증거로 작용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

한 대형 로펌 관계자는 “검찰이 로펌의 자체 포렌식 보고서나 자문 의견서를 무분별하게 압수해 수사를 진행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외국 기업들이 한국 회사나 로펌과 일하는 걸 점점 더 껄끄러워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지난해 7월 검찰 관계자들이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압수수색을 마친 뒤 압수품을 차량으로 옮기고 있다.  뉴스1

지난해 7월 검찰 관계자들이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압수수색을 마친 뒤 압수품을 차량으로 옮기고 있다. 뉴스1

 저인망식 압수수색 과정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영역이 ‘전자정보 압수수색’이다. 압수수색 영장이 ‘관련자료 일체’의 형태로 표현된 검찰의 청구대로 발부되는 경우가 잦은 상황에서 휴대전화나 PC 메모리에 저장된 방대한 정보 중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관련자료’인지가 늘 논란이다. 형사 전문 변호사는 “실무에서 수사기관이 어떤 정보를 선별했는지, 영장에 적힌 혐의사실과 관련된 정보만 가져간 게 맞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또다른 변호사는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싶어도 수사 받는 입장에선 ‘을’이라는 생각에 이의제기를 하지 못하는 상황도 많다”고 이야기한다. 한 검찰 수사관 출신 법조계 인사는 “파일명 등을 위장해 저장하는 경우가 많아 관련 자료인지 아닌지는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전자정보 압수수색의 적격 요건을 제한해 가고 있기는 하다. 전교조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수사기관이 컴퓨터들을 그대로 수사기관 사무실로 가져가 복사하자, 전교조 등이 준항고와 재항고를 제기한 사안에서 2011년 대법원 특별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전자정보 압수수색의 적법 요건을 처음 제시했다.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혐의 사실과 관련된 부분만을 문서 출력물로 수집하거나 수사기관의 저장매체에 파일을 복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답을 내놨다. 다만 “PC 등 저장매체나 복제본을 직접 외부로 반출해 파일을 압수수색하는 것은 영장에 기재돼 있거나 부득이한 사정이 발생했을 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며 재항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수사 현장과 하급심에선 압수수색의 범위와 한계를 둘러싼 신경전은 갈수록 가열되는 분위기다. 2020년 8월 울산지법에선 재판부가 “혐의사실과 관련된 전자정보로 범위를 특정하여 문서로 출력하거나 휴대한 저장매체에 복제하는 등의 원칙적 방법으로 전자정보를 압수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심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한 사례도 있었다. 대기업의 과산화수소 제조공정 기밀을 해외에 유출한 혐의로 기소된 중소기업 대표 등에 대한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 사건이었다. 재판부는 “기술유출 사건 특성상 수사기관이 혐의사실 관련 정보를 선별하기 어려웠다거나, 현장에 저장매체들이 많았다거나, 현장에 나간 인원이 부족했다는 점 등은 수사기관 측의 사정”이라며 “최소한 노력조차 하지 않은 이상 절차의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해 11월9일 오후 국회 본청에 있는 더불어민주당 정진상 당대표 정무조정실장 사무실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압수품이 든 박스를 들고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9일 오후 국회 본청에 있는 더불어민주당 정진상 당대표 정무조정실장 사무실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압수품이 든 박스를 들고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선을 넘는 저인망식 압수수색이 계속되는 이유를 법원의 안이한 태도에서 찾는 시각도 적지 않다. 검사출신 변호사는 “법원이 자기들이 내놓은 영장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다른 변호사는 “영장전담판사가 있는 큰 법원과 달리 작은 법원에서는 지나치게 포괄적인 영장도 발부되는 경우가 더 잦다”고 말했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혐의 사실이 있으니 영장을 안 내주기에는 찜찜한데, 그렇다고 다 내주기에는 ‘먼지털이식 압수수색’을 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죄를 하나라도 더 입증하려고 온갖 서류를 많이 붙여 영장을 청구하다보니 전자정보 압수수색이 꼭 필요한 부분을 가려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고법 부장판사는 “영장 별지에다 압수 대상과 범위를 한정하지만, 그대로 지켰는지는 법원이 알 수가 없다는 게 큰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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