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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갈등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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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얼마 전 지인이 소셜미디어에 이런 말을 남겼다. “왜 사람들은 늘 누군가에게 이토록 화가 나 있을까?” 순간 공감이 되어 냉큼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우리는 점점 더 불편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표출한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에 뉴스 댓글이나 소셜미디어에 바로 쏟아낼 수 있고 반드시 누군가는 동조해주니 금세 거세진다.

젠더갈등, 세대갈등, 노사갈등, 진보와 보수 등 전선은 여럿이다. 지적과 걱정은 많으나 누구도 자기잘못은 아닌 듯 말한다. 노조가 문제라서, 대통령이 잘못해서 등 누군가의 잘못으로 손쉽게 돌린다. 혹은 사전에 갈등을 제어하고 정부의 갈등관리 능력을 높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제언만 있다.

다른 의견이 있어야 건강한 사회
소통의 목적은 대화 지속에 있어
조롱·비방 경계하고 상대 인정을

팽팽한 의견 대립이란 과연 없어져야 마땅하고 이를 제거하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세상이 올까? 비슷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누구에게나 더 편하고, 의견 차이가 있는 사람과 마주침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이나 정책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 스스로가 옳았다는 인정을 받으니 자존감도 올라간다. 그래서 상대와 의견이 다른 상황이 지속되면 이내 불통이라 선언하고 더 나아가 상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 이야기를 종결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나 친구와도 온전히 소통하면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신념과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집단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 소통이 안된다고 서로 조급해하거나 답답해 하지 말자. 부부싸움은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서로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상황이야 말로 파국이 아니던가.

다같이 하나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회에 과연 살고 싶은지 반문해 보자. 하나의 이념을 지향하는 사회를 우리는 전체주의라 부르며 경계해 왔다. 사회적 소통이 설득을 하고 합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소통의 궁극적 목적은 대화를 지속하는 데 있다. 나의 이야기를 더 다듬고 피력하고자 노력하지만 다른 의견이 있음도 인정하고 판을 깨지 않는 것이 소통의 마음이다. 서로가 활발히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사회가 오히려 건강하다.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정책이나 정치지도자의 발언이 나오면 우리 사회는 들끓는다. 언론사 댓글창이나 소셜미디어에는 험한 말이 오고간다. 누구나 마음 속에 확신범은 있게 마련이고 속에 품은 생각이야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단, 이것을 겉으로 어떻게 드러내고 표현하는가는 사회적 문제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시민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끓는 열정을 식힐 줄 아는 쿨한 태도다. 내 생각이 정답이라는 믿음이 굴뚝같아도 그것만이 정답이라 목청껏 외치며 다른 의견을 오답으로 몰아가 기어이 이기고자 하는 마음을 식히는 자세다. 판을 깨지 않고 게임이 계속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조심조심, 세상에는 하나의 정답보다 여러 개의 해답이 가능함을 떠올리는 습관이 필요하다. 소위 사회지도층이 더 문제다. 많이 배울수록, 많이 안다고 생각할수록, 소통에 젬병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내 생각의 이유는 만 가지가 떠오르고, 상대의 생각은 잘 모르기 때문에 정답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

흔히 갈등의 심화를 가져온 것은 취향저격을 해대는 디지털 미디어의 알고리즘 탓이라고 한다. 기술 때문이라 지적질 하는 것은 참 솔깃하긴 하다. 불편한 댓글창을 아예 삭제하자거나 알고리즘을 규제하면 한 방에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안에 다른 의견들은 더 마주하고 성찰해야지, 불편하니 눈 앞에서 치우자는 접근은 문제를 뒷방으로 슬쩍 옮기는 것과 같다. 기술이 문제 발생의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없애야 할 것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에게 조롱과 비방을 퍼붓고 선정적인 이름을 붙여 상대 의견에 대한 진지한 경청과 숙고를 원천봉쇄하는 일이다. 악을 써서 상대방을 악마로 규정하고 제압해야 이기는 것이라고, 게다가 즉각적으로 의미가 통하는 자극적인 이름으로 먼저 호명해 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자칭 ‘전략가’들이 날뛰는 한, 그리고 이를 언론도 열심히 증폭하는 일이 반복되는 한, 한국사회의 갈등 관리는 계속 후진적인 수준에 남을 수 밖에 없다.

최근 정부의 강제징용 배상 해법을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완용에 빗대 비판하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들이 걸린 것을 보았다. 보도에 따르면 친일, 매국 등의 표현이 담긴 야당의 홍보안이 제시되었으나, 일부 의원들이 지나친 반일감정을 자극적으로 부추기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라 지적하면서 맞섰다고 한다. 앞으로는 이러한 보도가 더 크게 부각되고 이들이 누군지 밝혀 크게 박수쳐 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분들에게 나부터 후원금을 내고 싶다. 작은 실천이 답이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